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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敢言異說,아니면 말고] 기차를 타면서부터 우리는 불행해졌다!

권영구 2013. 8. 30. 15:38

[김정운의 敢言異說,아니면 말고] 기차를 타면서부터 우리는 불행해졌다!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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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8.30 03:03

    독일과 일본, 정확함의 대명사… 공통점은 '기차의 나라'
    近代 상징 기차는 '시간통제' 필수, 時間에 맞춘 생활 시작돼
    더 빨리 가려 막히면 뚫고 끊기면 잇는 '직선의 강박' 나타나
    세계서 가장 빠른 '직선적 사고'의 한국… 省察이 필요한 때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나는 독일에서 13년을 살았다. 지금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독일과 일본의 공통점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일단 두 나라 사람들은 정확하다. 직접 겪어 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실하다. 그들이 만든 물건은 믿을 수 있다는 거의 맹목적 신뢰가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두 나라 모두 '기차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기차 때문에 독일 사람, 일본 사람이 그렇게 정확해지고 성실해졌다는 이야기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독일의 이체에(ICE)나 일본의 신칸센은 타보면 정말 세계 최고 수준이다. 또한 이들의 각종 열차는 나라의 구석구석을 커버한다. 자가용이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최초의 기차는 영국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국의 기차가 산업혁명의 완성이었던 반면, 유럽에서는 운송혁명이 먼저고 산업혁명이 뒤따라왔다.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강 시벨부시의 설명이다. 가장 뒤처져 산업혁명을 이뤘던 독일과 일본에 기차는 선진국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 조건의 구체적 내용은 시간이다. '기차 시간'.

    '기차 시간'은 절대 어겨서는 안 된다. 독일, 일본이 시계를 그렇게 잘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물론 스위스의 시계가 더 유명하다. 그러나 스위스의 '기차 시간'은 독일의 기차문화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독일, 일본식 '기차 시간'을 매개로 한 근대적 성실과 정확함이 산업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되면서 양상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기차 시간'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통제'다. 기차 시간은 정확히 지켜야 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단 몇 초의 오차만으로도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그네스발차나 조수미가 매번 '기차는 8시에 떠난다'며 슬프게 노래하는 거다(그런데 이 노래의 결정적 결함은 그 8시가 오전인지 오후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통제와 예측의 '기차 시간' 이데올로기는 모든 기차역의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야 하는 '표준시'의 문제로 옮아간다. 그러나 표준은 언제나 힘 있는 자의 몫이다. 영국의 그리니치표준시가 그렇고, 한국의 표준시가 도쿄표준시를 따르게 된 것도 그렇다. 기차역은 이 표준시와 그 뒤에 숨겨진 권력을 예배하는 '카테드랄'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신을 찬양하지 않는다. 기차역의 가장 높은 곳에 걸려있는 시계를 예배한다.

    '기차시간'의 내면화는 독일, 일본식 근대교육의 핵심이다. 초 단위까지 정확해야 하는 스위스 기차역 시계처럼 각 개인의 삶은 자율적으로, 정확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감시와 처벌의 푸코식 판옵티콘이 내면화된 것이다. 그들은 이를 '교양(Bildung)'이라 불렀다.

    이제 시간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상품의 가치는 더 이상 '사용가치'가 아니라 시간이 투여된 양으로 계산되는 '교환가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기차역은 죄다 백화점이나 아케이드로 연결되는 거다. 일본의 철도 회사들은 아예 내놓고 백화점을 직접 차려 버린다.

    시간이 내면화되자, 인간 의식은 이제까지 없었던 아주 치명적 위협에 노출된다. 시간이 되어야만 먹고,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인간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안 졸려도 시간이 되었으면 자야 하고, 배고프지 않아도 시간이 되었으니 먹어야 한다. 비만이나 거식증, 혹은 불면증은 이러한 내적 시간에 쫓겨 생기는 정신질환이다.

    
	기차는 음란하다. 자꾸 들락거린다.
    /김정운 그림
    '기차 시간' 이데올로기의 더 큰 문제는 '직선의 강박'이다. 자연 상태에 유클리드 기하학적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철도는 각 역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직선상에 놓여야 했다. 막히면 뚫었고, 끊기면 이었다. 4대강 문제도 도무지 휘어있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이 '직선의 강박'과 무관하지 않다.

    직선으로 정신없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사람들은 넋 놓고 차창 밖을 내다본다. 전경(figure)과 배경(ground)이 구분되지 않는 파노라마적 풍경이다. 너무 빨리 지나가 도무지 초점을 맞출 수 없는 이 파노라마적 경험은 또 다른 심리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도대체 뭐가 중요하고, 뭐가 불필요한지 헷갈리게 된다는 거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를 미국의 내과의사 조지 비어드는 '신경쇠약'이라고 정의했다.

    '기차 시간'의 모순을 오늘날 우리에게 옮겨보면 상황은 아주 심각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빠름, 빠름, 빠름'의 롱텀에볼루션 속도로 인해 야기될 집단심리학적 부작용은 '기차 시간' 따위의 부작용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여전히 막히면 들이받으려고 하는 '직선적 사고'다. 도무지 쉬어가거나 돌아갈 줄 모른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압축성장이 만들어낸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다. 이건 약도 없다.

    이제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각오하든가, 아니면 느리게 성찰하든가.

    아, 끝으로 하나 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기차를 타면 음란해진다고 주장했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울림에 성적으로 흥분하게 된다는 거다. 프로이트의 동료 칼 아브라함은 아예 "기차를 타면 다음날 몽정을 하게 된다"며 경고까지 했다. 기차는 한때 거대한 바이브레이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