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서울 속으로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것들이 유난히 빛나는 계절입니다. 낡음의 미학을 즐기면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기 좋은 요즘, 서울 속 근대유산 나들이는 어떨까요. 늦가을, 머리와 가슴을 채우는 '근대산책(近代散策)'을 시작합니다.
■근대 문화재에서 만나는 근현대 미술
경성역에서 서울역으로, 서울역에서 다시 2009년 7월 복합문화공간으로 태어난 문화역서울 284(02-3407-3500, seoul.org)에선 장기 전시인 '환대(歡待)'(~2015년 12월 31일)와 함께 '유연한 역사(驛舍)'(~2013년 12월 31일)전을 연다. 허리 숙여 인사하며 '환대'하는 듯한 커다란 조각상 'Greeting Man'의 인사를 받고 역사 입구로 들어서면 개찰구부터 만난다. 직원이 승차권을 끊어주던 개찰구는 안내 정보 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투박한 모양의 커다란 시계와 스테인드글라스 천장, 햇살이 들어오는 격자창 등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역사 곳곳엔 미디어아트 작가 유비호, '비주얼아트팩토리 힐긋'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이번 '유연한 역사'전은 문화역서울 284가 근대유산이라는 과거의 공간이 아니라 동시대의 다양한 문화예술을 만날 수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유연한 공간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취지에서 기획됐다"는 게 전시 관계자의 설명. 문화역서울 284에서는 11월 23일~12월 31일에 '근대성의 새발견-모단 떼끄놀로지는 작동중'전도 연다. 근대성을 화두로 다양한 테크놀로지와 그러한 기술들이 오늘날 문화, 예술 속에서 어떻게 구동되고 있는지를 작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10시~오후 7시 무료 관람.
우리나라 근대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덕수궁 석조전 서관 덕수궁 미술관(02-2022-0600, mmca.go.kr)에선 '한국 근현대회화 100선'(~2014년 3월 30일)을 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이번 전시에선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빨랫터', 김환기의 '산월', 천경자의 '길례언니', 김기창의 '군작' 등 1920~1970년대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근현대 작가 57명의 유화 70점, 수묵채색화 30점 등 100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20여 개의 국공립 기관 및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작품을 모은 이번 전시는 한국 근현대 회화의 대표작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관람료는 덕수궁 입장료 포함 어른 6000원, 중고생 3000원이며 11월 한 달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을 기념해 보호자 동반 초등학생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한눈에 살펴보는 '근대유산 1번지'
덕수궁까지 갔다면 '근대유산 1번지'라 불리는 정동(貞洞, 중구 정동)길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정동길에선 구 러시아공사관, 덕수궁 중명전, 정동교회, 구 대법원청사 등 문화재와 유서 깊은 건물들을 근대 원형 그대로 또는 원형과 비슷하게 복원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 이 근대유산들은 문화유산국민신탁(ntch.kr)에서 진행하는 정동길 근대문화 유산 도보 탐방 프로그램인 '다같이 돌자 정동 한바퀴'와 함께하면 더욱 알차게 둘러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정동의 유래에 대한 해설사의 해설을 시작으로 아관파천의 현장인 구 러시아공사관,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역사박물관, 구 대법원청사, 구세군중앙회관·구세군역사발물관, 덕수궁 선원전 터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전시관 등을 약 120분간 천천히 둘러보는 코스로 진행된다. 매주 토·일요일 오후 1시 30분에 정동극장 앞에서 무료로 열린다. 참가 신청 및 문의는 이메일(nt_her itage@hanmail.net)이나 전화(02-752-7525)로 한다(단, 탐방은 동절기 12월~다음 해 3월, 하절기 7~8월과 명절 휴무).
정동길 내 구 대법원청사인 서울시립미술관(02-2124-8800)에서 진행하는 '2013 서울사진축제-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12월 1일)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근현대사 속 인물과 연관한 초상 사진과 초상화를 통해 각 시대의 사회상과 문화상을 살펴보는 전시다. 식민지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촬영된 신체측정 사진이나 유관순 등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 시대별 가족사진과 결혼사진 등 다양한 초상화와 초상 사진을 만날 수 있다. 화~금요일 오전 10시~오후 8시, 주말 및 공휴일 오전 10시~오후 6시 무료 관람. 한국어 전시 설명은 매일 정오와 오후 3·5시에 한다.
■옛 명사들 자취 남아 있는 '가옥' 탐방도
역사의 위인이나 명사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옛 가옥 탐방도 해볼 만하다.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홍난파가옥(070-8112-7900)은 '고향의 봄'의 작곡가 홍난파가 6년간 거주하면서 말년을 보낸 곳. 많은 대표작을 이곳에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1층의 붉은 벽돌조 건물은 늦가을이면 빛바랜 담쟁이로 뒤덮여 더욱 운치 있다. 실내에는 홍난파 기념관과 소공연장이 마련돼 있다. 동절기 오전 11시~오후 4시 자유 관람. 홍난파가옥 인근 서울기상관측소는 아름드리 단풍나무 아래 앉아 늦가을을 즐길 수 있으니 간 김에 들러보면 좋다. 종로구 옥인동 박노수미술관(02-2148-4171)은 동양화가 박노수가 1973년부터 2011년까지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했던 곳으로 '박노수가옥'으로 불리다가 지난 9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개관했다. 이 집은 원래 친일파 관료였던 윤덕영이 자신의 딸을 위해 1938년에 지은 2층 벽돌집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어 1930년대 후반 한국인 건축가의 저택 설계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집터 뒤쪽에는 추사 김정희가 당시 문인들과 모여서 풍류를 즐기던 곳인 송석원(松石園)을 음각으로 새긴 바위가 있다. 오전 10시~오후 6시 자유 관람.
화가의 아틀리에를 구경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성북구 동선동 주택가에 숨어 있는 근현대 조각가 권진규의 아틀리에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과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생전에 사용했던 의자, 테이블, 이젤 등은 만지면 먼지가 뽀얗게 묻어날 것처럼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아틀리에 내부의 모든 것들은 낡아서 자칫 파손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만져볼 수는 없다"는 게 권진규 아뜰리에의 관리를 맡고 있는 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관계자의 말이다. 이곳은 입주 작가들의 작업실로 활용되는 만큼 자유 관람은 불가하며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02-3675-3401, nt-heritage.org)을 통해 선착순 사전 신청한 20명에 한해 약 1시간 동안 무료 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글 박근희 기자 | 사진 김종연 기자 | 일러스트 손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