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모음

[데스크에서] '빨리빨리'의 自畵像

권영구 2013. 8. 17. 11:05

[데스크에서] '빨리빨리'의 自畵像

  • 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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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8.09 03:12

    
	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 사진
    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

    "아니, 무슨 기념품 매장이 직원들 점심 먹는다고 문을 닫아! 손님들은 점심시간에도 몰려오는데…."

    지난주 강원도 원주의 한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가족을 비롯한 몇몇 관람객들은 전시물 구경을 마치고 기념품 매장에 들렀다가 '12시~1시 점심시간'이라고 써놓은 안내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웅성거렸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주말이면 서울 근교 박물관이나 각종 체험시설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서울에서 2시간을 달려간 길인데 1시간을 허비하자니 다음 일정에 차질이 있었다. 손님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박물관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미리미리 알아보고 관람 전에 기념품점부터 들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처음 든 생각은 '이곳이 민간 영리 시설이어도 이랬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백화점이나 상가(商街)에서 물건을 살 때는 점심시간이라고 기다릴 필요가 없다. 영업시간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소비자들의 '천국'이다. 편의점은 24시간 영업하고, 웬만한 수퍼마켓도 밤 12시까지 문을 열어 놓는다. 은행도 점심시간이면 식사 시간을 쪼개 직원들이 교대로 '손님'을 맞는다.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빨리빨리' 정신과 함께, 이런 '24시간 오픈' 정신이 한국적 경쟁력의 원천이었다. 종업원들의 삶은 고달팠겠지만, 국민 한명 한명이 물건을 사고, 서류를 떼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느라 허비되는 시간을 줄여 나라 전체의 총합으로 봤을 때 '속도'와 '효율성'을 높였다. 그렇게 밤을 새워서라도 제품을 완성하고 수출 납기를 맞춘 것이 개발시대 한국인의 자화상(自畵像)이었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이런 삶의 방식에 '균열'이 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연중무휴 문을 열던 대형마트들은 요즘 격주로 요일을 정해 일괄 휴업에 들어간다. '골목상권 보호'를 위해 나온 제도지만, 주말에 한번 쉬어 본 일부 마트 직원들이 휴식을 통한 '삶의 질'을 챙기기 시작했다는 말이 들린다. '잘 사는' 것의 가치는 부(富)뿐만 아니라 여가(餘暇)를 얼마나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삶이냐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경기가 어렵다는데도 캠핑족이 200만명을 넘어섰고, 인천공항을 이용한 휴가철 해외 여행객 숫자가 얼마 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도시에 살던 고학력자들이 귀농을 하고, 좀 덜 벌어도 여유로운 삶을 선택하는 '다운시프트'(down-shift)족이 등장한 것도 벌써 몇년 전이다.

    이제야 고백건대, 그날 점심시간 한 시간도 기다리지 못했던 것은 일정을 빽빽하게 잡았기 때문이었다. 기념품 매장 직원들의 점심시간은 활용하기에 따라 박물관을 꼼꼼하게 한 시간 더 둘러보는 시간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진 찍고, 아이 체험활동 보고서에 쓸 자료만 후다닥 챙겨 '자, 다음 장소로!'를 외치고 있었다. 여가를 찾아 떠나온 곳에서 정작 내겐 여유가 없었다. 내 삶은 아직 '빨리빨리'의 속도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