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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21세기의 다빈치 떠나다

권영구 2011. 10. 7. 10:22

 

[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21세기의 다빈치 떠나다

조선비즈 | 김승범 기자 | 입력 2011.10.07 03:02 | 수정 2011.10.07 09:30


 

"가장 위대한 혁신가를 잃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애플'의 창업자 겸 전 최고경영자(CEO)로 우리 삶을 혁신했던 스티브 잡스(56)가 5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다. 기술·경영·디자인을 꿰뚫어 본 '이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뉴욕타임스)도 암과 벌인 7년 전쟁에선 승리하지 못했다. 2004년 췌장암 수술, 2009년 간 이식 수술을 받고도 보란 듯 다시 나타난 그였다. 잡스는 지난 2월 17일 미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자신에 대해 '6주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고 보도한 다음 날 오바마 대통령이 주재한 IT 기업 경영진과 만찬 회동에 참석했고, 3월 2일 아이패드2 제품 발표회에 나왔다.

애플의 공식 웹사이트는 특유의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둥근 안경을 착용한 잡스의 흑백 사진으로 전면을 채우고 '스티브 잡스, 1955~2011'이라는 문구만 달았다. 그리고 "스티브의 영민함과 열정, 에너지가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 덕분에 우리 삶은 윤택해지고 향상됐다"고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뒤 입양,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로부터 축출된 뒤 복귀와 재기, 희귀암 발병과 투병, 아이폰·아이패드 출시를 통한 디지털 시대 새 라이프 스타일 창조…. 그는 드라마의 상상력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극적이었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입양됐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말했다.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지만 "딸을 시리아인 유학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심슨 부친의 반대로 미혼 상태에서 잡스를 낳았다. 잡스는 '대학 진학을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양부모 폴·클라라 잡스에게 맡겨져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잡스는 호기심이 강해 늘 말썽을 일으켰다. 집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약을 먹고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전자 부품을 조립해 만드는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학·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진 않았다.

잡스는 오리건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공부를 때려치운다. 그는 중퇴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당시 친구의 방바닥에서 자고, 먹을 것을 구하려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한 종교 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7마일(약 11.3㎞)을 걸어가기도 했다.

히피 저항 문화에 휩쓸려 밥 딜런과 비틀스에게 빠져 살았던 잡스는 자퇴 후 다니던 전자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불교로 개종해 아내 로린 파월과 결혼식도 불교 의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1976년 다섯 살 많은 '동네 형'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공동 창업한다. 사무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양부모 집의 창고였다. 잡스는 이듬해 개인용 PC 애플2를 내놓으면서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세 때인 1985년 자기가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동안 내놓은 매킨토시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면서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됐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다. 그는 1996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디지털 시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PC 시대를 열었던 그는 PC 이후 시대까지 열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올해 1월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CEO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 사임 당시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말했다. 그는 췌장암 판정 후 '죽음'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의 중대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를 돕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상기하는 것이다" "묘비에 '최고 부자 잠들다'는 글귀엔 관심이 없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굉장한 일을 해냈지'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에 길을 내준다"고 말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서 "늘 갈망하고 늘 우직하게 살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잡스가 이끈 제품은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었다. 혁신의 산물이었다. 그는 "혁신은 우리가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 정말 많은 노력을 투입했다고 생각하는 1000가지 일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잡스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섰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른 놀라운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내십시오."(2006년 5월 NBC뉴스 인터뷰)

그는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3세 때 여자 친구 크리스 앤과 사이에 딸 리사가 태어났지만 혈육임을 부인했다. 양육비도 주지 않아 미혼모 앤이 근근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아이를 키웠다. 나중에 성장한 딸이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그제야 자기 딸로 받아들였다. 그는 올해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면서 당시 일을 언급했다. 생부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끝내 매몰차게 외면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독재자'나 '사소한 일에까지 목숨 건 관리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디자인·광고 문구에도 관심이 많아 300개 특허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카피 탄생에 관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아이패드(iPad)에서 따온 '아이새드(iSad)'라는 추도사가 퍼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빌 게이츠는 잡스가 자주 썼던 표현을 인용하며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insanely great honor)'이었다"고 말했다. IT 분야 싱크탱크인 엔드포인트 테크놀러지의 로저 케이 소장은 "전체적인 영향으로 본다면 스티브 잡스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그레이엄 벨에게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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