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뉴스

[Why] 주물공장 이야기꾼, 지금껏 없던 글을 쏟아내다

권영구 2018. 3. 8. 15:29

[Why] 주물공장 이야기꾼, 지금껏 없던 글을 쏟아내다

입력 : 2018.03.03 03:02

[어수웅의 어프로치] 학벌도 족보도 없는 무명작가 김동식… 투박하고 황당한 이야기들, 그런데 재미있다

[어수웅의 어프로치]
10년 동안 서울 성수동의 지하 공장에서 김동식씨는 ‘뺑뺑이’를 돌렸다. 원심동력기와 금형 틀을 돌리며 그가 만든 건 단추만이 아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이야기, 이야기들. 중1을 마지막으로 학교에 간 적 없지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경험을 350편의 짧은 소설로 지어냈다. 그에게는 세상이 선생님이었다. / 이태경 기자
2일, 전국 초·중·고등학교가 입학식을 가졌다. 하지만 김동식(33)씨는 20년 전 중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가지 못했다. 아니 가지 않았다. 형편도 어려웠지만, 공부를 못해서든 결석 때문이든 혼나는 게 싫었다. 못하는 것 때문에 혼나느니 아예 안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PC방을 전전했고, 스무 살 무렵부터 서울 성수동 아연 주물공장에서 10년 넘게 국자를 잡았다. 500도 넘는 액체 아연을 국자로 떠서 금형 틀에 부었다. 첫 달 월급 130만원. 빙글빙글 도는 틀에서 굳은 아연은 단추와 지퍼, 때로는 구두 장식이나 허리띠 장식으로 바뀌었다.

공장 생활 10년이 지나며, 단추나 지퍼 말고 동식씨가 만든 게 하나 더 있다. 이야기다. 낮에는 아연물 국자를 잡고, 밤에는 키보드를 잡았다. 일하며 듣던 SBS 라디오 '두시 탈출 컬투쇼'에 보낸 사연이 뽑히자, 약간의 자신감도 생겼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짧은 소설을 지어 올렸다. 처음엔 맞춤법도 엉망진창이었다. 선의의 댓글을 학교 선생님 강의처럼 받들었고, 포털사이트에 '글 잘 쓰는 법'을 검색해 따라 했다. 그 앞뒤로 중졸 검정고시와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2016년 11월에는 공장도 그만뒀다. 마지막 월급은 180만원. 그리고 자신의 반지하 방에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지었다.

[어수웅의 어프로치]
무명작가 김동식의 소설이 화제다. 작년에는 온라인에서 화제였고, 종이책으로 나온 올해는 오프라인에서도 돌풍이다. 그가 처음 글을 올린 인터넷 공간은 온라인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200자 원고지 20~30장 분량의 짧은 소설이었다. "재미있다"는 댓글 응원이 괴력의 생산성을 낳았다. 평균 이틀이나 사흘에 한 편,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 350여편을 지었다. 원고지 1만장, 장편 소설 10권 분량이다. 그의 인터넷 독자 중에 현대소설 전공자이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사회' 등을 쓴 김민섭(35)씨가 있었다. 김씨는 조심스럽게 자신과 인연이 있던 출판사에 이 무명작가를 연결했고, 출판사 대표인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모험을 시도한다. '이름'도 '족보'도 없는 무명작가의 단편을 묶어 세 권 동시에 출간한 것. '회색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 (이상 요다刊)가 그 제목들이다. 두 달 만에 5쇄를 찍었고, 2만부가 나갔다. 이달 중에 4권과 5권도 출간할 예정. 1만부 작가도 희귀한 요즘 출판 시장에서 이례적 성공이다.

평생 글 쓰는 법이라고는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다는 청년을 소설가로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이 청년에게 사회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책 안 읽기로 이름난 한국 독자들은 왜 이 무명작가의 책을 사는 것일까.

―주물공장에서 10년 동안 일하던 청년이 소설가가 되었다. 어린 시절 꿈이었나.

"전혀. 어려서는 꿈이 없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 그런 질문 받으면 '오락실 주인'이라고 대답했다."

―가족 중에 글 쓰는 사람이 있는지.

"평생 살면서 주변에 글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요즘 당신 세대는 공장에 취직하는 걸 꺼린다고 들었다. 무례한 질문이지만, 왜 공장이었나.

"공장 들어가기 전에 PC방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월급이 60만원이었다. 생계가 어려웠다.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으니 취직이 어려웠다. 그때 외삼촌이 서울에 공장 자리를 소개해줬다. 특별한 기술 없이 몸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몸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

"성수동 지하에 있는 주물 공장이었다. 400~500도의 아연로(爐)에 아연을 넣어 녹인 뒤 액체 상태로 만든다. 지퍼나 단추 등을 만드는 고무 금형 틀이 있다. 원심동력기에 그 금형을 넣어 회전하게 만들고, 아연물을 국자로 떠서 회전하는 틀 중앙에 천천히 붓는다. 그러면 아연물이 금형 안에서 바깥쪽으로 퍼지며 틀의 모양에 맞게 굳고, 식었을 때 꺼내면 그 형태의 지퍼나 단추가 완성된다."

―첫 월급을 기억하나. 얼마였고 그 돈으로 무얼 했는지.

"130만원이었던 것 같다. 옥탑방을 구할 때 빌린 돈을 갚으려고 20만원, 방세 21만원, 엄마에게 보내줄 20만원, 적금으로 40만원을 빼고 나니 29만원이 남았다. 통신비 공과금까지 생각하면 한 달 동안 아껴 써야 했지만, 제일 먼저 피자를 사먹었다. 월급 받는 날에 비싼 음식 하나 먹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하."

이미지 크게보기
지상으로 올라가는 지하의 계단. 공장 생활 10년 동안 김동식씨는 단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성실성으로 지난 18개월간 350편의 소설을 썼다. / 이태경 기자

―공장 생활 10년, 약과 독이 됐던 부분은.

“규칙적으로 돈을 번다는 것. 소비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먹고 싶을 때 치킨을 시켜 먹을 수 있고, 대형마트에서 쇼핑도 한다는 게 정말 좋았다. 원래 인내심이 없어 학교도 결석하고 그랬는데, 나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한 것 같아 개인적으로 뿌듯했다. 10년 넘게 일하면서 한 번도 결근이 없었다. 지각한 기억도 거의 없다. 독은… 굳이 말하자면 인간관계가 너무 단조로워진 것. 원래 사람을 잘 못 사귀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일 자체가 온종일 기계 앞에 앉아서 벽만 보고 하는 거였다.”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학교는 왜 가지 않았을까.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다. 학교 가는 것보다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숙제를 안 해서 혼나고 학교를 안 나와서 혼나고, 이런 것들이 쌓일수록 점점 더 학교 가기 싫어지더라.”

소년 시절, 동식씨는 ‘엄마’하고만 살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괄호 속에 넣었지만, 직접 돈을 벌어야 할 형편이었다는 것. 원단 공장에서 가위질도 했고, 전화국 건물 짓는 막일꾼으로도 일당을 벌었다. 18세 무렵 고향 부산에서 대구로 올라왔다. 바닥에 타일 붙이는 일을 배울 생각이었지만 일 자체가 없었고, 급한 대로 우선 PC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교 밖 청소년은 책이 아니라 사회에서 삶을 배웠다.

―어떤 사람들을 만났나.

“PC방에서 일할 때 정말 다양한 손님들이 있었다. 떼인 돈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친 욕부터 폭력까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또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미성년자와 동거 중이던 조폭도 있었다. 엄청난 덩치의 문신을 한 사내였다. PC방에서 대기하다가 도우미를 부르면 바로 가서 일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아래층이 노래방이었다. 컴퓨터 몇 대로 온라인게임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는 아저씨, 항상 야동을 보거나 이상한 화상 채팅을 하는 할아버지도 만났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는 형이 제발 2만원만 빌려달라고 사정하길래, 일하는 중이니까 내 저금통에서 2만원만 빼가라고 알려줬다. 그런데 저금통 안의 30만원을 다 들고 갔더라. 한 달 버틸 생활비였는데. 연락이 안 되다가 한 달쯤 지나서 말로만 미안하다고 말한 뒤 또 돈을 빌려달라고 하더라고. 사람에 실망했던 경험이다.”

―이때의 경험이 소설에 반영됐을까.

“나는 그분들에게 모두 친절하게 대했다. 그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으며 거리낌 없이 지냈다. 그렇다면 나도 결국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걸까. 이런 의문으로 쓴 이야기가 있다. 범죄자든 누구든 모두에게 가리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는 청년은 과연 착한가, 착하지 않은가를 묻는 소설이었다.”

전통적인 소설 미학으로 김동식 소설을 평한다면, 이는 의미 없는 시도가 될 것이다. 문장도 투박하고, 플롯도 두루뭉술. 그런데 재미있다. 신의 계시, 외계인의 침공 등을 소재로 한 만화적 상상력이지만, 그때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책을 기획한 김민섭씨는 “가볍게 읽히면서도 자기와 우리 사회를 향한 무거운 물음표를 던지는 글에 빠져들었다”고 했고, 문학평론가 서영인은 “삶에서 다른 것들을 상상하는 능력. 자기의 서사를 갖고 싶어하는 자들의 고독한 보람”이라고 썼다.

―소설가 김동식으로 화제를 바꾸자. 처음 쓴 글은 정말 맞춤법도 안 맞았나.

“정말 못 봐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사실 요즘도 맞춤법을 가끔 틀린다.”

―첫 소설은 어떻게.

“온라인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에 공포 게시판이 있다. 누구나 글을 써서 올릴 수 있는 공간이다. 창작 소설을 올리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의 글을 보다가 나도 한 번 올려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무엇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막상 글을 올리고 나니 재미없다고 욕먹을까 봐 두렵더라. 그런데 놀랍게도 재미있다는 댓글이 달린 거다.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태어나서 내가 스스로 한 일로 칭찬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인터넷 게시물 하나에 불과하지만,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글 쓰는 법은 어떻게 배웠는지.

“평생 글 쓰는 법을 한 번도 배운 적 없다. 댓글과 인터넷으로 배웠다. 처음에 네이버 지식인에 ‘글 잘 쓰는 법’이라고 검색을 해 봤다. 지금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있어야 한다, 접속사를 많이 쓰지 말고 문장은 쉽고 간결해야 한다, 말줄임표를 많이 찍지 마라’ 등등이 생각난다. 지키려고 가장 애쓴 건 ‘문장이 쉽고 간결해야 한다’였다. 첫 글을 올렸는데,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그때부터 많은 분이 조언 댓글을 달아주셨다. 틀린 맞춤법 고쳐주신 분, 개연성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신 분, 결말이 이랬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제안해 주신 분….”

―첫 월급이 130만원이었다. 3권의 인세로 받은 돈은.

“5쇄 인세까지 들어왔는데, 3800만원 정도다. 정말 깜짝 놀랐다. 신기하고 얼떨떨하고 이 상황이 진짜구나 싶었다.”

―글쓰기는 당신에게 무엇을 줬나. 그리고 당신의 독자들에게는 무엇을 주고 싶은가.

“글쓰기는 제게 즐거움을 줬다. 최근에는 인생의 변화까지 줬다.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저는 독자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다. 아침 출근길에 잠시, 화장실에서 잠시, 자기 전에 볼 만한 재미를 드리고 싶다.”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야기일까.

“상상도 못 했던 결말이 있는 이야기, 여운이 남는 이야기다. 뭐가 여운이 남는 이야기일까 생각해봤는데, 읽고 나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여운이 남더라. 판단이 필요한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전에는 등단을 해야 소설가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글을 쓰는 시대다. 작가는 누구일까.

“나는 형편없는 글솜씨를 가진 사람이다. 작가라는 호칭은 부담스럽다. 내 생각으로는 남들이 봐주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즐거움이든, 정보든, 깨우침이든, 뭐라도 보는 사람들의 목적을 채워주는 사람. 너무 당연한 말인가. 문학이 뭔지 모르니까 편견도 없다. 나처럼 배운 게 없더라도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시작하셔도 좋을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가 10년 동안 일했던 성수동 주물공장을 찾았다. 간판도 붙어 있지 않은 지하의 작은 공장. 사방 벽면에는 지퍼나 단추의 모태였던 원형 고무틀 수천 개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동식씨가 ‘뺑뺑이’라고 불렀다는 원심동력기를 보여준다. 지금은 새로 들어온 막내가 그 ‘뺑뺑이’를 돌린다. 큰 형님뻘인 김정빈 사장은 “신기하고 대견하다”며 “동식이가 꼭 성공해서 책으로 먹고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지만, 그에게는 세상이 선생님이었다. 저금통을 털어 간 아는 형도, 엄청난 덩치의 PC방 조폭도, 야동을 보던 할아버지도, 나온 지 1년 넘었지만 큰형처럼 의지하는 주물공장 사장님도, 그리고 댓글을 달아준 이름 모를 네티즌도. 학교를 뛰쳐나온 걸 후회하느냐 물었을 때, 동식씨는 “지금은 후회한다”고 했다.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고 그냥 가기 싫은 마음 하나로 그만두면, 평생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고 살게 될 겁니다. 재미없어요.”

그의 말처럼, 가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 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 없는 젊은이라면 학교에 있어도 허송세월. 반대로 참된 젊은이라면 학교 밖에서도 배운다. 경험한 만큼, 성실한 만큼 배운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다고 했다. 3월이다. 봄이 시작됐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2/20180302013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