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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프란치스코 교황 탄생과 한국 정치

권영구 2013. 3. 20. 16:29

[강천석 칼럼] 프란치스코 교황 탄생과 한국 정치

  • 강천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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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입력 : 2013.03.15 22:06 | 수정 : 2013.03.15 23:33

    위기 속에서 以心傳心만으로 '시대의 正答' 꺼낸 바티칸
    종교인만이 아니라 정치인들도 '로마의 이틀' 연구하고 배워야

    강천석 주필

    새 교황 프란치스코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는 동안 내내 기분이 즐거웠다. 참 좋은 아침이었다. 그가 베풀고 실천한 선행(善行)이 보통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위대한 성인의 행적(行蹟)과 달리 누구라도 애써 노력하면 불가능하지 않을 듯해 은근히 마음이 놓였는지 모르겠다. 이 대목 저 대목에서 우리 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 성철 스님 같은 분을 다시 떠올려 보는 기쁨 또한 쏠쏠했다. 이러다 보니 간혹 비치는 새 교황에 대한 비판에도 한결 너그러워졌다. '그림자가 없으면 그게 사람인가 도깨비지…' 하는 기분 말이다.

    발코니로 나온 새 교황의 얼굴은 우선 편해서 좋았다. 마음이 곧 얼굴이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흘러나온 첫마디는 낮아서 더 좋았다. 스스로를 '교황'이라 일컫지 않고 '로마 주교'라 부르는 겸손에 "추기경들이 새 지도자를 찾기 위해 거의 세상 끝(아르헨티나)까지 갔다"는 유머가 얹히자 주위가 다 환해졌다. 준비된 리무진 차량을 물리치고 셔틀버스로 방금까지 동료였던 추기경들과 숙소에 돌아가 함께 저녁을 들며 던진 "하느님께서 (나를 뽑은) 당신들을 용서해주시기를…" 하는 기막힌 건배사(乾杯辭)는 또 어떤가.

    추기경 시절 번듯한 공관을 마다하고 작은 아파트에 들어가 혼자 밥하고 해진 옷을 바느질해 기워 입으며, 운전사 딸린 자동차 없이 버스나 지하철을 즐겨 이용했다는 새 교황이다. 몇몇 신부가 돈을 모아 교황 선출을 위한 로마 회의에 참석하러 떠나는 그의 낡은 구두를 새 구두로 바꿔줬다는 얘기도 들려 왔다. 그런 인품이니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예약하려던 비서 신부를 타일러 일반석을 사도록 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호 문제만 해결된다면 지하철 속에서 교황을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프란치스코의 이런 생활이 어마어마하게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작지만 은은하게 빛난다. 신앙이 없는 사람조차 새 교황에 얽힌 사연을 좇다 한나절이 절로 가며 즐거워지는데 가톨릭 신자들은 얼마나 흐뭇하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겠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여기 계시지 않는 바보 김수환 추기경을 또 한 번 그리워했을 거고, 개신교나 불교 신자들은 한경직 목사와 성철 스님이 떠난 빈자리가 더없이 허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사람은 가도 향기는 남는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

    사실 지난 몇 년 바티칸은 무거운 고민에 짓눌려 왔다. 관료주의와 부정부패, 신자 감소 문제는 그래도 드러내 토론하며 대책이라도 세울 수 있다. 일부 사제의 아동 성추행 문제처럼 어디 대놓고 털어놓기 민망한 것도 적지않다. 게다가 빠르게 변하는 세속 사회는 낙태, 피임, 안락사, 동성(同性) 결혼, 여성의 성직(聖職) 허용 여부에 관한 교리(敎理)의 해석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사제(司祭)들도 이 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로 갈리고,신자들의 중심이 유럽에서 비(非)유럽으로 이동하면서 지역 문제까지 끼어들었다. 속된 말로 안팎 곱사등 처지였다.

    바티칸은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대답을 내놨다. 청빈(淸貧), 겸손의 상징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은 당장 가톨릭 교회의 새 출발을 향한 각오로 받아들여졌다. 교리 문제엔 보수적이면서도 가난과 불평등 문제 해결에는 누구보다 적극적 목소리를 내온 새 교황이 걸어온 길은 가톨릭 내부의 보수·진보 간 갈등을 상당 부분 누그러뜨릴 것이다. 남미 아르헨티나 태생이지만 이탈리아 이민(移民) 자식이란 프란치스코의 가계(家系)는 비유럽 사제와 신도들에겐 가톨릭의 새 시대 개막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유럽을 향해 과거와 급격한 단절이 아닌 자연스러운 변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따뜻한 인품에다 사회와 언론과 소통하는 능력이 빼어난 새 교황이라 교회 교리를 크게 바꾸지 않고도 교회가 당면한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리라는 기대도 모으고 있다.

    추기경 115명은 신(神)의 손을 빌리지 않고선 꺼내기 어려운 프란치스코란 정답을 단 이틀 만에, 그것도 아무 토론 없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꺼내 들었다. 칼 도이치란 정치학자가 유럽 2000년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정치조직으로 왜 대영제국과 로마 가톨릭을 꼽았는지 이해할 만했다. 도이치는 "팽창하고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조직은 누구라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수축(收縮)하는 조직을 낭떠러지에서 추락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인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고 했다.

    우리 종교인들은 새 교황 프란치스코와 바티칸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난상(爛商)토론 한 번 없이 오로지 이심전심만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시대의 정답'을 뽑아낸 '로마의 이틀'을 더 열심히 연구해야 할 사람들은 우리 정치인들이다. 대통령, 새누리당, 민주당이 '로마의 이틀'을 거듭 살펴보면 그 안에 지난 석 달 국민이 왜 그렇게 속이 터졌는지 이유가 담겨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