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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들의 쪽지>를 기억하시나요?

권영구 2011. 5. 22. 15:00

 

<십대들의 쪽지>를 기억하시나요?

머니위크 | 김부원 기자 | 입력 2011.05.22 11:53 |



[[머니위크]People/ 강금주 < 십대들의 쪽지 > 발행인]

"안녕하십니까. < 십대들의 쪽지 > 발행인 김형모입니다."

전화 수화기 너머로 한 남성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첫인사를 한다. 그리고 이 남성은 한 청소년의 고민을 소개한 뒤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처음에는 재미삼아 수화기를 들었던 청소년도 이 남성의 진심어린 걱정과 조언에 빠져들며, 조금씩 마음과 표정이 진지해진다.

지금은 30~40대가 된 성인들 중 상당수는 1980~90년대 청소년 시절 읽던 < 십대들의 쪽지 > (이하 쪽지)를 기억할 것이다. 청소년들의 고민과 이에 대한 친절한 상담이 담긴 손바닥 만한 쪽지는 매달 전국의 여러 학교에 배포됐으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도록 무료 전화쪽지도 등장했다. 그리고 그 쪽지는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발행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 환경과 청소년 문화가 바뀌어서인지 쪽지에 대한 관심은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게 사실이다.

2008년에는 발행인인 김형모 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쪽지 발행이 중단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인 강금주 씨가 발행인 역할을 이어 받았고, 쪽지는 27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무려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쪽지를 발행하면서 겪었던 고충과 청소년들을 향한 바람, 그리고 故 김형모 씨에 대한 사연을 듣고자 강금주 발행인을 만났다.

- < 십대들의 쪽지 > 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김 선생님은 본래 신학을 전공하고 교회에서 중고등학생 담당 전도사로 활동했던 분이다. 그렇다보니 청소년들의 고민에 대해 잘 알게 됐고 그들에에 도움을 주고자 쪽지 발행을 시작했다. 1984년 9월 5000부를 발행하면서 시작됐고 1988년부터 전화쪽지도 시작했다.

-두분이 인연이 된 계기가 궁금하다

▶나는 고등학교 국어교사이자 쪽지 독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김 선생님이 도움을 요청했다. 한 여고생이 성폭행으로 임신을 해서 상담과 도움이 필요했는데, 여자인 내가 도와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얼마 후 그 여학생이 임신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다. 때가 됐는데도 생리를 하지 않아 크게 걱정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김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몇번 만나지 않아 결혼까지 골인했다. 사실 내가 먼저 프로포즈했다.

- < 십대들의 쪽지 > 를 발행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당연히 금전적인 부분이다. 후원금은 발행 비용의 10분의 1도 차지하지 않는다. 모두 김 선생님이 사비로 부담했다. 그래도 2000년대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강의와 방송출연 등이 많아 수입이 어느 정도 안정적이었지만, 나중에는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특히 2004~2008년에 많이 고생했는데 대출을 받아서 발행했을 정도다. 또 쪽지 발행의 원칙이자 김 선생님의 소신 중 하나가 쪽지에 절대 광고를 싣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고를 실으면 금전적인 문제가 조금 해결되겠지만, 쪽지의 순수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형모 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쪽지를 계속 발행하기로 한 이유는

▶김 선생님은 2004년부터 특별한 질병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그리고 2008년 12월 급성췌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는 호주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고, 언어연수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홈스테이를 운영 중이었다. 주변 분들은 내가 쪽지 발행을 이어 받지 말고, 호주에서 여유 있는 삶을 살라고 권했다. 어쩌면 김 선생님도 내가 발행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쪽지를 통해 알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해서 계속 발행하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청소년들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을 것 같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청소년들의 모습, 가치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회환경이 날이 갈수록 변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 것이다. 그런데 가장 안타까운 일은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들이 급격히 늘었다는 점이다. 6개월마다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청소년들을 만나는데 3~4년 전만 해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가 100명 중 한두명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10명 이상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청소년이 있다면

▶어떤 부모가 중학생 딸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려 한 적이 있다. 평소 공부도 곧 잘 하고 성실한 아이였는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학교도 안 가려고 하고, 성격도 변했다는 게 이유였다. 비타민이라고 속이면서 약도 먹였는데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자 응급차까지 불러 정신병원에 보내려 했던 것이다. 일단 부모를 뜯어 말리면서, 병원에 가기 전 아이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그 여학생을 만났는데 이성문제로 고민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년간 청소년들과 함께 하다 보니 각자의 성격, 특징, 문제 등이 한눈에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는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긴 뒤 학교 가는 것도 두려워하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내 눈도 안 마주치던 아이가 4시간 정도 대화하면서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아이를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킨다고 해서 치료가 되겠는가.

-어른들이 청소년들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게 많은 것 같다

▶그렇다. 부모들은 아이가 조금만 이상해도 병원에서 진료 받고 약 먹으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정신과 진료를 받은 아이들은 무턱대고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또 일주일에 한번씩 의사를 만나고 약을 먹는다 해도 가정환경과 부모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뭐가 달리지겠는가. 청소년들의 문제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모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은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서 아이들만큼은 올바르게 살 것이라 생각해선 안 된다.

-청소년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청소년들에게 항상 당부하는 말이 인생을 크게 보라는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게 꿈이 없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무엇인가 하려는 욕구가 부족하다. 그래서 청소년들을 만나면 일부러 꿈을 만드는 시간을 갖도록 이끌고 있다.

-앞으로 계획이나 포부는 무엇인가

▶현재 < 십대들의 쪽지 > 역사를 정리한 책을 쓰고 있다. 쪽지 발행은 한 개인이 시작한 소소한 일이었지만, 발자취를 정리하고 싶었다. 곧 김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는데 그 전에 발간할 예정이다. 또 자녀가 아닌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도 함께 쓰고 있다.

쪽지와 관련한 재단을 만들자는 제안도 많이 받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김 선생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런 유언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대학생이 된 두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기곤 한다. 그중 하나가 내가 만약 죽으면 쪽지 발행을 마감하자는 것이다. 김 선생님이 개인적인 소명으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