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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 '30년 터줏대감' 김인협 악단장

권영구 2010. 11. 16. 12:20

[최보식이 만난 사람] 전국노래자랑 '30년 터줏대감' 김인협 악단장

  • 입력 : 2010.11.15 03:11 / 수정 : 2010.11.15 07:47

"송해는 늘 오빠, 난 왜 할아버지유?… 노래는 역시 港口쪽이 맛깔"
호남에선 바로 '십년지기'… 경상도는 한순배 돌아야… 충청·강원은 '무덤덤'해요
부부동반으로 전국 돌아… 내 노래? 아마 예심서 '땡'
송선생과 몇명이서 한잔… 둘만 남았는데 소주가 30병

“혹간 항의하는 분도 있어유. 내가 다른 콩쿠르대회에선 1등 먹는데 왜 떨어뜨리느냐고. 아, 라디오 프로라면 100% 붙습니다. 텔레비전 프로는 귀보다 눈이 먼전데 보이는 게 뭐 있어야지. 완전히 뻣뻣하게 작대기인데…. 이렇게 설명을 ‘잘’ 해드리면 다들 수긍해요.”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는 송해 선생은 ‘간판 마담’일 뿐이다. 무대 한쪽에는 색깔 있는 안경을 쓴 김인협(70) 악단장이 버티고 있다. 실상 출연 여부의 명줄은 그에게 달렸다. 녹화 이틀 전 그는 예심을 본다.

김인협 악단장

"텔레비전에 안 나와 그렇지 예심 때가 훨씬 더 재미있어요. 출연신청자와 구경꾼들로 회관이 꽉 차니까요. 하지만 100명이 오든 1000명이 몰려오든 딱 15명을 뽑아요. 서울대 들어가기보다 더 힘들어유. 군청 직원들이 ‘누굴 붙여달라’고 부탁도 합니다. 그러면 제가 ‘저기 객석에 앉은 분들이 보면 오해하니까 가까이 오지도 말라’고 하지요.”

송해가 현역 최장수 MC라면, 그는 현역 최장수 악단장이다. 송해만큼 햇볕에 그을리고 약간 처진 얼굴, 씩 웃을 때는 입도 컸다. 무대에선 툭하면 골리고 장난치는 송해의 ‘밥’이 되지만, 인터뷰에선 그가 반격했다.

“전국노래자랑이 30년 최장수 프로인데, 송 선생님이 이 무대에 선 건 27년이 안 되지요. 저는 29년이 됐어유. 따지면 제가 한참 위지요(웃음).”

나도 농을 했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 장기 집권하는 비결은요?

“우연히 발 들여놓았다가 담당 PD들이 ‘1년만 더 1년만 더’ 붙잡는 바람에 이렇게 됐지요. 지금까지 그렇게 저를 붙잡은 PD들이 100명 이상 갈렸어요. 1995년 정년퇴임하고는 계약직으로 해요. 사실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한두 번 해야 재미있지 통상 2박3일 묵어야 하는디. 지방 축제 날짜에 맞추다 보면 이게 또 몰려요. 4월과 5월, 9월과 10월에 축제가 제일 많아요. 그럴 때는 버스가 방송국에서 출발하면 한 달 뒤에야 돌아와유.”

"여행용 가방에는 무얼 넣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쑥스러운 웃음부터 지었다.

"글쎄 그게, 무대에 서려면 와이셔츠는 입어야 하는디, 빨아주는 사람도 없고…. 난 집사람과 같이 댕겼어요. 지금도.”

―다른 단원들도 부부동반?

"그렇게 못하죠. 내가 제일 어른이니까 나만 그래요(웃음). 예심을 봐야 하기 때문에 나와 PD, 작가는 하루 일찍 내려와요. 출연자들에게 빠른 노래면 춤을 추고 느리면 온몸으로 연기를 해라고 주문해요. 일부러 ‘땡’ 감도 뽑아요. 화면에서 재미가 있거든. 탈락한 사람들은 얼굴이 알려진 내게 꼭 항의해요. 다음날에는 종일 출연자의 음 높낮이에 맞게 노랠 편곡하느라 정신 없어요. 단원 10명 것을 악기에 맞게 만들어줘야 해요. 그걸 마칠 때쯤 송 선생님과 단원들이 2진(陣)으로 함께 내려와요.”

김인협 악단장은“전국노래자랑을 하면서‘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느낀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그의 집에는 건반악기 넷, 색소폰 둘, 트럼펫 하나, 아코디온 셋, 가야금, 거문고, 아쟁, 해금, 대금, 징, 꽹과리 등이 있다. 악기를 다룰 줄 알고 그 음역을 알아야 편곡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좀 지나간 노래의 곡조는 그의 머릿속에 다 입력돼 있다. 그가 바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은 천 단위가 넘어간다. 하지만 요즘 젊은 출연자들은 나온 지 일주일밖에 안되는 댄스그룹 노래까지 불러대는 판이다.

"젊은 애들이 춤추면서 ‘지지배배’ 불러대는 것은 저도 입력이 안 돼요. 처음 듣는 노래가 나오면 과거에는 읍내 음반가게에 가서 테이프를 샀어요. 하지만 이런 음반가게가 사라졌어요. 요즘은 인터넷에서 찾아서 따고, 읍내 노래방으로 가서 ‘혹시 그런 노래 입력돼 있느냐’고 물어서 녹음을 해와요. 그래도 안 되면 출연자를 불러 다시 노래를 시켜요. 들으면서 그 자리에서 채보(採譜)를 하지요.”

내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 애먹이는 ‘최신곡’을 부르는 출연자는 예심 때 떨어뜨리질 않고요.

"노래 잘하고 잘 노니까 합격시키는 거지. 곡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잘하는 애를 떨굴 수 없잖아요. PD 입장에서는 저 노래가 시중에 나와있는지 어떤지 모르고, 곡을 찾아야 하는 내가 문제지요.”

그가 무대의 ‘등장인물’이 된 것은, 송해가 어린 출연자들에게 “저 할아버지한테 가서 용돈 받아라”며 장난을 치면서부터다.

"처음에 작가가 그런 장난을 만들어놓았는데, 시청자들이 이게 재미있다네. 이제 송 선생님의 십팔번이 됐어요. 그런데 ‘당신은 늘 오빠고 나는 왜 할아버지유?’ 게다가 돈은 으레 내 주머니에서 나가요. 송 선생님 주머니에서는 안 나와요. 한번은 5000원짜릴 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요. ‘애, 이거 색깔이 틀리다’며 기어이 만원짜릴 빼가요.”

색깔 있는 안경을 낀 그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띈다. 백내장 수술로 인한 것이었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유명세는 ‘현찰’로 지급된다.

"녹화 끝나고 올라오다가 휴게소에 들렀는데 한 꼬마가 절을 꾸벅하며 손바닥을 내밀어요. 내 얼굴이 있는데 안 줄 수 있나요. 식당에서도 한 아이가 ‘할아버지’ 인사하고 돈을 받아가면, 그걸 보고 다른 아이가 ‘저도 주세요’ 하며 와요. 전북 김제에서 노래자랑할 때 꼬맹이 셋이 만원씩 받아갔어요. 10년 만에 다시 거기서 노래자랑을 했는데, 아이 셋이 나와 무대에서 큰절을 해요. 예심 때는 못 알아봤어유. 내게서 받은 돈을 그대로 간직했다가 돌려주는 거요. 이미 화폐가 바뀌어 쓸 수 없었어유.”

전국노래자랑에서 그는 한 번도 펑크를 내지 않았다. 딸 결혼식 때는 녹화 일정과 겹치는 바람에 결혼식을 한 달 앞당기기도 했다.

"딸 결혼식 날짜를 담당 PD에게 ‘이날은 피해라’고 미리 알려줬어요. 그런데 뉴욕에서 요청이 들어온 거요. 날짜 조정이 안 됐나 봐요. 상견례도 안 한 사돈에게 찾아가 ‘한 달만 당기자’고 했지요. 제가 편곡을 해야 되니, 대신 해줄 사람이 없어요. 한번 하고 끝내는 지방 콩쿠르도 아닌데 소홀히 할 순 없지요.”

―남녀노소 출연자들이 무대 위에서 노는 것을 30년 가까이 바라봤는데, 좀 촌스럽다고 느낄 때는 없나요?

"솔직히 ‘상류사회’ 사람은 이런 데 안 나오잖아요. 대부분 중산층 이하지요. 꾸밈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을 접하다 보면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 별거 있나’ 느낄 때가 많아요. 욕심 부리지 말고 주어진 데서 즐기며 살아라, 제 자식들도 그렇게 키웠어요.”

―가장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요?

"초창기 때는 시골 여자들이 무대에서 ‘난리’치면 그 동네서 욕먹었어요. 햇수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한번은 며느리가 노래하는데 그 앞에서 시아버지가 손자를 업고 ‘잘한다 잘한다’ 하며 춤을 춰요. 그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젊은 애들은 시키는 대로 다 해요. 송 선생님께 달려가서 뽀뽀하고 그러잖아요. 그 여자 신랑이 저 앞에 있고 시부모들이 다 와있는데.”

―악단장께도 뽀뽀하고 그러잖아요.

"제게는 어떨 때 한번 그렇고(웃음). 제가 늙은 건지, 옛날을 떠올려보면 너무 달라졌어요. 처음에는 노래자랑에 미성년자들을 출연시키지 않았어요. 가수 장윤정이 꼬마 때 온 적이 있는데 ‘더 자라거든 오라’며 안 받아줬어요. 하지만 인터넷이 생긴 뒤로 ‘우리는 사람이 아니냐, 왜 안 뽑느냐’며 항의가 막 들어오는 거유. 이제 중고교생 중에도 특출한 애는 뽑아요. 웬만하면 다 떨구지만.”

―전국을 다녀보면 지역적 특성을 느낄 때도 있겠지요?

"지금까지 한 지역을 세 번쯤 돌았을 거유. 역시 항구(港口) 쪽이 노래가 세요. 부산 목포 인천 사람들이 활발하고 잘 놀아. 서울보다 노래 실력이 더 나아요. 내륙으로 가면 확실히 떨어져요.”

―노래 실력 말고 지역 기질이나 음식맛 같은 것은요?

"송 선생님이 내려오는 날 저녁에는 지역 군수님이 자리를 마련해요. 손님 접대 스타일을 보면 호남 쪽에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십년지기’여. 경상도도 잘하지만 처음 대할 땐 좀 딱딱해. 일단 한 순배 돌아야 대화가 돼요. 충청도와 강원도에서는 대접하는 것이 무덤덤해요. 옛날에는 음식이 안 맞아 고생이 많았어요. 욕 얻어먹겠지만 경상도 시골로 가면 간이 안 맞아 참 먹기 어려웠어요. 내 고향이 충청도이지만 충청도도 별 게 없어요. 음식이 시원찮으면 중국집으로 가요. 대한민국 자장면은 어디든 비슷하거든요.”

―전국노래자랑 녹화 전날 담당 PD들의 주요 업무는 송해 선생이 술을 못 마시도록 감시하는 것이라고 들었는데요?

"녹화 전날이면 으레 송 선생님과 술을 붙었어요. 새벽 두 시고 세 시고. 2년 전쯤 담당 PD가 제게 ‘송 선생이 술을 못 마시게 하라’고 해요. ‘나도 술 마시는데 그 양반께 그만 마시라고 할 수가 있겠냐’고 대꾸했으나, 그날 밤 취한 김에 송 선생님께 말했어요. ‘앞으로 술 그만 드세요’ ‘왜?’ ‘마시지 말래요’ ‘누가?’ ‘모 PD가 녹화 날 카메라로 얼굴을 클로즈 업 하면 표가 난대요’ 그 말을 들은 뒤로 송 선생님은 거의 안 마셔요. 이제는 PD들이 편해졌죠.”

―그동안 객지에서 두 분이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소주만 마시는데 둘이 앉으면 끝이 없어요. 이런 얘길 하면 안 되는디. 부곡 온천에서 저녁 식사하면서 약간 얼큰했어요. 숙소로 돌아가다 ‘입가심 한잔만 더 하자’며 동네 마트의 파라솔 탁자에 여섯 명이 앉았어요. 쥐포와 오징어를 놓고 마시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어요. 나중에 일어서면서 보니 서른 병쯤 되더라고요. ”

―두 분이 그렇게 붙어다니면 다툴 때도 있겠지요?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제가 져야죠.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 ‘어제는 제가 잘못했어유’ 하면, 형님은 헤헤 웃고 말어요. 우린 약속했어요. 송 선생님이 전국노래자랑을 그만둘 때면 저도 관두겠다고.”

―전국노래자랑 악단장이라면 노래도 수준급이겠지요?

"송 선생님은 웬만한 가수 저리 가라고 할 정도지만, 저는 가사를 아는 노래가 단 하나도 없어요. 곡조는 알아도. 연주만 하니까 가사를 욀 이유가 없어요. 대신 필링(감정)은 좋지요.”

―예심에서 떨어지겠는데요.

"아마 ‘땡’ 할 확률이 높겠죠.”

 

 

●현역 최장수 악단장 김인협

서라벌예대 작곡과 졸업, 청주방송에서 5년, 카바레 밴드생활 10년, 1974년 동양방송, 1980년 KBS 악단. 1981년부터 '전국노래자랑' 악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