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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아웃?… 오심 걱정에 악몽 “우리도 할 말은 있다”

권영구 2010. 7. 9. 16:51

심판 아웃?… 오심 걱정에 악몽 “우리도 할 말은 있다”

[2010.07.01 18:16] 국민일보 10-7-2        


정해상 월드컵 심판에게 물었다… 오심은 왜

6월 30일. 월드컵 개막 이후 처음 경기가 없던 이날,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시(市) 외곽으로 버스 2대가 빠져나갔다. 아프리카의 야생 들판에 도착한 이들 중엔 우루과이 호르헤 라리온다(독일-잉글랜드 16강전 주심)와 이탈리아 로베르토 로세티(아르헨티나-멕시코 16강전 주심) 심판도 있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월드컵 심판 87명을 위해 마련한 ‘소풍’이다.

지난 며칠 오심에 따른 마음고생으로 얼굴빛이 좋지 않던 두 사람도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이날 밤 심판 숙소인 프리토리아의 한 호텔에선 조촐한 환송회가 벌어졌다. 이제 조별리그와 16강전 56경기가 끝났다. 2일부터 8강전이 시작된다. 심판 29개조 87명 중 짐 싸는 자(10개조 30명)와 남는 자(19개조 57명)가 가려졌다. 경기 운영 평가 결과다. 라리온다와 로세티 심판은 짐을 쌌고, 유일한 한국인 정해상(39) 심판은 살아남았다.

프리토리아 ‘심판촌’

지난달 14일 오후 6시 ‘심판촌’인 이 호텔에서 디브리핑(debriefing)이 시작됐다. 매수·부정을 막기 위해 모든 심판이 이곳에서 함께 생활한다. 어느 경기에 나설지는 일주일 전에야 통보되며, 경기 전날 해당 도시로 이동한다.

디브리핑은 FIFA 심판위원회가 논란이 있는 판정을 비디오 자료로 만들어 심판들을 교육시키는 시간이다. 이틀 전 한국과 그리스 경기가 나왔다. 전반 15분 이청용 선수가 그리스 골문 앞에서 슈팅하려다 수비수 발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이다. 화면이 멈췄다.

심판위원회 관계자의 질문. “이 장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 수비수를 퇴장시키고 페널티킥을 줘야 합니다.” 한 심판이 이렇게 말했고, 이어진 몇몇 심판의 답변도 같았다. 그러자 주심을 맡았던 뉴질랜드 마이클 헤스터 심판이 입을 열었다. “반칙이 아닙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 뒤 다음 장면 분석으로 넘어갔다. 디브리핑 결과로 판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다. 그래도 지적된다는 것 자체가 심판에겐 불명예다.

정해상 심판은 1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이 상황을 소개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디브리핑에서 오심 지적이 나온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위원회 측에서 심판들의 사기를 고려해 문제가 될만한 장면을 가져오지 않은 것 같아요.”

유달리 오심 논란이 많아 서로 지켜주자는 이런 분위기는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한다. 정 심판은 “모두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리다보니 일종의 운명공동체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심판들은 가능하면 밝게 지내려 애쓴다. 전날 경기가 있던 심판을 만나면 가볍게 포옹도 하면서 ‘고생했다’는 위로를 잊지 않는다. FIFA가 ‘소풍’을 준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 심판은 “라리온다는 결승전 심판을 볼 만한 재목인데… 모두들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심판촌에선 매일 오전 훈련이 있다. 9시부터 12시까지 여러 반칙 상황을 연출해주는 현지 고교 축구선수들과 함께 뛰며 판정 감각을 유지한다. 이번 월드컵에선 특별한 훈련이 추가됐다. 부부젤라 대응 훈련. 엄청난 소음에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FIFA는 부부젤라 소리와 관중 함성을 합성해 확성기로 틀어주며 매일 심판들을 적응시킨다. 정 심판은 “첫 경기에 나갔는데 연습했던 소음과 똑같았다. 정말 놀랐다”고 했다.

월드컵 심판이라는 것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 한 달간 심판수당으로 2만8000달러쯤 받았어요. 올림픽에선 한 달에 6000∼7000달러였죠.”

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98년 프랑스월드컵에 심판으로 참여했던 전영현(53)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의 말은 상징적이다. ‘인류의 축제’라는 올림픽도 월드컵에는 비교 대상이 못 된다. 적어도 축구에선 그렇다. 심판으로 그 무대에 서기란 선수로 출전하는 것만큼 어렵다.

월드컵 이듬해 각 대륙 축구연맹은 다음 월드컵 심판 후보들을 FIFA에 추천한다. FIFA는 이들을 3년간 FIFA 주최 경기에 내보내고 다양한 ‘시험’을 치러 평가한다. 심판으로 월드컵에 가려면 ‘6.2초 안에 40m 달리기’를 6차례 반복하는 스프린트 심사에 합격해야 한다. ‘30초 안에 150m 달리기’와 ‘35초 안에 50m 걷기’를 20회 반복하는 테스트도 거친다. 연간 두 차례 축구 규칙 시험을 영어로 치른다. 영어 말하기 시험도 있다.

월드컵 심판 선발 방식은 ‘트리오 시스템’이다. 후보들은 주심 1명, 부심 2명이 한 팀이 돼 평가받는다. 3명 중 1명만 불합격해도 3명 모두 탈락하는 공동운명체다. 팀은 출신국가와 나이를 고려해 구성한다.

남아공월드컵 개막을 코앞에 둔 지난달 9일 칠레의 파블로 포조 퀸테로스 심판이 부상했다. 그와 한 팀을 이룬 다른 심판 2명도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3년간 동고동락하는 트리오 시스템은 심판진 의사소통에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시아에선 24명(주심 8명, 부심 16명)이 이번 월드컵 심판 후보로 추천돼 절반이 탈락하고 12명(주심 4명, 부심 8명)만 남아공 무대를 밟았다. 심판들의 ‘주전 경쟁’도 심하다. 정 심판은 “이번에 참가한 아시아 심판 4개조 중 한 팀은 경기 배정을 받지 못해 대기심으로만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심판은 월드컵 무대를 처음 밟았다. 월드컵 심판 ‘정년’은 45세. 과거 한국인 월드컵 심판 4명은 모두 한 차례 참가 뒤 정년 규정에 걸려 은퇴했다. 다섯 번째인 정 심판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까지 두 대회 연속 참가를 노려볼 수 있는 나이다.

월드컵 심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정 심판은 지난달 11일 케이프타운에서 우루과이와 프랑스 경기 부심으로 데뷔했다. 일본 니시무라 유이치 주심, 사가라 도루 부심과 같은 조다. 경기장에 가려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는데 누군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프랑스 출신의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 회장이었다. 자국 경기를 맡은 심판에 ‘눈도장’을 찍으려 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오심

“프랑스월드컵에서 B조 예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경기 제2부심이었어요. 오프사이드를 보지 못해 이탈리아 로베르토 바조에게 단독 찬스를 주고 말았죠. 골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경기 후 비디오를 보고서야 알았어요.” 전영현 심판위원의 고백이다.

심판은 오심을 피해갈 수 없다. 특히 페널티 지역에서 플레이가 벌어질 때 그렇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 부심으로 참여한 김대영(47)씨는 오심의 90%가 페널티 박스 안이나 부근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페널티 박스 안의 할리우드 액션이 가장 판단하기 힘들죠. 직감을 믿어야 해요. ‘이거 같은데’ 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어요. 스스로 갈등하다 보면 망가지죠.”

오심을 막을 방법은 현재로선 심판 간 협력뿐이다.

“주심이 문제될 장면을 잘 못 보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부심이 용기 있게 말해줘야 해요. 하지만 서로 믿다보니까 ‘주심이 잘 보고 있겠지’ 하다가 한 템포 늦어지면 정정할 시간이 사라져버려요. 그냥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거죠.”(김대영)

독일월드컵부터 심판들이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다. 주심과 부심(2명), 대기심 등 4명은 헤드셋으로 경기 중 계속 대화한다. “주로 힘을 북돋아주는 말을 하죠. 주심이 휘슬을 불면 ‘미스터 ○○, 굿 디시전(good decision)’이라고 하는 식이에요. 오프사이드 판정이나 주심이 보지 못한 파울을 지적할 때도 부심은 깃발과 동시에 헤드셋을 통해 말로도 알려줘요.”(정해상)

울렁증

오심 스트레스는 상상을 넘어선다. “요즘 새벽 5시만 되면 잠에서 깬다”는 정 심판은 월드컵이 끝나면 무엇보다 푹 자고 싶다고 했다. “카메라가 야속하죠. 심판들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에요. 경기마다 32대가 샅샅이 찍고 있으니까 정말 신경이 쓰이죠.”

지구촌 수십억명이 심판의 휘슬을 쳐다보고 있다. 한순간 방심하면 세계 언론이 달려들어 십자포화를 쏟아 붓는다. 실수는 연일 방송 전파를 탄다. 득점과 관계된 실수를 하면 다시는 경기를 배정받지 못한다. 심판 경력에 치명타다. 페널티킥 실축한 선수에겐 명예회복의 기회가 찾아올지 몰라도 오심 심판에게 축구계는 냉정하다.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은 최근 “골라인 판독 기술에 대해 논의하겠다”며 비디오 판독 반대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심판들은 비디오 판독보다 ‘6심제’ 도입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비디오 판독이요? 글쎄요. 스포츠의 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양측 골대 뒤에 심판 2명 추가하는 6심제를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비디오를 도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전영현)

“돈 많은 FIFA가 한국 K리그도 도입한 6심제를 왜 주저하는지 모르겠어요. 주요 오심의 90%가 페널티 지역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6심제만 해도 오심을 상당히 줄일 수 있어요.”(김대영)

정 심판은 지금 있는 심판들부터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세 경기를 뛰었는데 경기장 밖에서 모니터로 실시간 경기 화면을 볼 수 있는 대기심들이 헤드셋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선수교체와 인저리 타임 알림용으로만 쓰이는 대기심을 잘 활용하면 오심을 줄일 수 있을 텐데. 수년간 호흡을 맞춰온 주심과 부심의 대화에 끼어들기 민망해서 말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대기심으로 앉아 있으니 기분도 다운되고, 그래서 그럴 겁니다.”

역시 축구에서도 소통이 문제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