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1.05 06:08
FD-리포터 등 비정규직이라 노조가입도 못해·· 억울해도 속앓이만
전문가 "관행이라고 방치하면 '폭탄'…전수조사 통해 문제해결을"

아나운서가 꿈인 A씨는 바늘구멍보다 좁은 방송국 취업문을 뚫기 위해 2년 전부터 리포터로 일하며 방송경력을 쌓고 있었다.
그러던 A씨에게 최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상사 아나운서였던 B(58)씨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차 한 잔 마시자던 B씨는 A씨 옆에 붙어 앉아 거칠게 손을 잡아끌며 안았고 뽀뽀까지 요구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했지만 비정규직인 A씨는 혹시나 불이익을 당할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6개월 더 일했다. 하지만 정규직 아나운서는 되지 못하고 방송국을 그만뒀다.
#2. 케이블 방송국에서 연출보조(FD)로 일하고 있는 C(25)씨. 그는 연출자(PD)의 꿈을 키우며 1년6개월 전 방송 일을 시작했다.
평소에도 함께 일하는 PD로부터 폭언과 욕설 등을 들었던 C씨는 지난 8월 평생 잊지 못할 모욕을 겪었다.
뉴스 생방송을 하던 중 C씨는 '1번 카메라'를 외쳤지만 PD가 잘못 알아듣고 2번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자료 화면이 나가야 할 때 앵커의 모습이 몇 초간 방송됐다.
PD의 실수로 인한 사고였으나 방송이 끝나자 C씨를 향해 욕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그 장면을 지켜봤다. 치욕의 시간은 10분 넘게 계속됐다.
C씨는 그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정규직 PD 앞에서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매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아나운서나 PD의 꿈을 안고 방송국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는 것은 꿈꾸던 일을 한다는 기쁨보다는 비정규직의 서러움이다. 싱그러워야 할 이들의 청춘은 욕설과 폭언, 성희롱 등으로 짓밟힌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2년6개월간 FD로 일한 D(31)씨는 "욕설과 폭언은 생활"이라고 토로했다.
"넌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 너 말고 방송일 하고자 하는 애들은 널려있다"는 말부터 "너 이런 식으로 일하면 경력 인정 안 해주고 단순 아르바이트로 처리한다"는 등의 협박에 이르기까지 상처받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지역의 한 방송국에서 2년 여 작가로 일한 E(26·여)씨는 "주위의 비정규직 리포터나 작가들이 성희롱 당했다는 소문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면서도 "모두 '비정규직'인 탓에 선뜻 나설 수 없어 쉬쉬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주고 울타리가 돼 줄 단체는 전무하다.
또 비정규직인 탓에 방송국 내 노조 가입은 꿈도 못 꾼다. 억울한 일이 생겨도 속앓이만 할 뿐이다.
심지어 이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전국에 모두 몇 명이나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분기별로 몇 개의 방송국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또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일하는 경우가 허다한 탓도 크다.
이들은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워야 한다'는 미명 아래 방송국이 우리의 미래를 담보로 젊음을 '착취'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비정규직 방송인들은 스스로를 '5분 대기조'라고 표현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5분 안에 방송국으로 달려가야 하는 탓이다.
출·퇴근 시간도 맡은 프로그램의 스케줄에 따라 들쑥날쑥이다. 쉬는 날은 꿈도 못 꾼다. 24시간 내내 방송국에 얽매여 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이들은 10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월세와 교통비, 식비,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버겁기만 하다.
이들은 휴일 근무와 야간 근무 등이 생활이지만 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없다. 휴일 수당 등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언감생심이다.
A씨는 "방송국이 짧으면 몇 개월, 길면 2년이면 떠나는 우리의 처우 개선에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소모품'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털어놨다.
B씨는 "선배들이 업무를 떠맡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며 "내 꿈을 핑계로 자신들의 편의만 찾는 것 같아 야속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궁극적인 꿈은 방송국 정규직 직원이 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경력을 쌓아야 하는 이들이 비정규직의 서러움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모두가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자신만 멈춰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는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를 '관행'이라며 덮어두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전수조사를 통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기형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방송국 내부 운영진과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 비정규직 문제를 과거로부터 이어온 '관행'으로만 간주하고 있다"며 "잠재된 갈등이 심각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와 방송국 모두 문제에 대해 알려고 나서지도 않고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는 것 같다"며 "전수조사를 통해 피해 현황을 파악하고 드러난 사례를 기반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방송사들은 앞에서는 사회 정의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내부에서는 청춘들의 꿈을 짓밟고 있다"며 "이런 불공정한 일들이 계속돼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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