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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골목 음식점' 낡은 공식을 깨자

권영구 2013. 10. 14. 10:06

 

'창업=골목 음식점' 낡은 공식을 깨자

창업국가 구호 요란하지만 곳곳에 사업 가로막는 장벽
개·폐업 쳇바퀴에 혐오증

 

중앙일보 | 심재우 | 입력 2013.10.14 01:35 | 수정 2013.10.14 09:17

 

한국의 창업은 '골목 개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이 요식업이고 개·폐업도 많다. 그래서 골목 간판은 1년이 멀다 하고 바뀐다. 왼쪽은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대입구역 먹자골목의 2011년 12월 모습이고, 오른쪽은 지난 9월 23일 모습이다. 오른쪽 사진 컬러 부분이 1년10개월 사이 바뀐 간판들. [박종근 기자]

#1.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의 다카시마야(高島屋)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멀티숍 '도큐핸즈' 7층 매장. 지난달 26일 찾은 이곳에서 '망상(妄想)공작소' 코너가 눈에 띄었다. 대기업 제품이 아닌, 일반인들이 낸 기발한 아이디어를 상품화해 전시한 곳이다. 이날은 축구공 모양의 주먹밥을 만드는 제품, 도시락 크기에 맞춰 음식을 자르는 칼 등 도시락 관련 편의기구 수천 점이 진열돼 있었다. 일단 이 매장 진열대에 오르면 전국의 상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매장 담당 고쿠분 이치로(國分一郞)는 "매달 200건 정도의 아이디어를 인터넷을 통해 접수해 매장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2. 정주형(26·연세대)씨는 화병이 나기 직전이다. 올해 1월 창업했던 '엄니박스'가 문제다.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 내 유명 반찬가게의 반찬을 집으로 배송해주는 서비스로, 월 매출 500만원을 올려왔다. 그러나 지난 9월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식품제조 가공업 허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관할 구청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시장 내 33㎡ 내외 규모의 상점은 허가 자체를 받을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정씨는 "온라인 사업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규정 탓에 한창 궤도에 오르던 사업을 접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꿈을 접고 취업 공부 중이다.

 '창업 국가' 구호가 요란하다. '창조경제' 정책의 핵심이자 저성장·취업난을 뚫을 해법으로 주목받으면서다. 그러나 한·일 두 나라의 창업 환경은 이렇게 다르다. 일본은 아이디어만 좋으면 소비자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한국에선 성과를 내던 업체마저 언제든 고꾸라질 수 있는 장애물이 곳곳에 있다.

 그렇다 보니 창업은 '골목 개업(開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지가 지난달 9~10일 전국 만 1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창업' 하면 떠오르는 업종을 묻는 질문에 요식업이 64.3%로 압도적이었다. '요식업을 제외한 창업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67.9%가 '없다'라고 답했다. 요식업 개업도 개인에겐 큰 도전이지만, 이런 골목 개업은 쳇바퀴 같은 개·폐업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서울 건대입구역 상가 지역만 해도 1년10개월 전과 비교해 절반 가까이 간판을 바꿔 달았다. 김정식 연세대 상경대학장은 "주변에 요식업으로 창업해 망한 정년 퇴직자가 많아지면서 한국 사회는 오히려 '창업 기피증'에 빠지고 있다"며 "개업이 아닌 제대로 된 '창업'을 할 수 있는 정책이 제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골목을 벗어난 창업으로 가는 길이 좁다는 점이다. 우선 판로가 없다. 연대보증까지 서 며 어렵게 시제품을 만들어도 소비자를 만나기 어렵다. 도큐핸즈를 통해 '짧고 부드럽게 휘는 귀이개'를 히트시킨 가토 게이치(加藤惠一·61)는 "(도큐핸즈와 같이) 뭔가를 믿고 달려들 수 있는 게 있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유럽 등에선 제품이 아닌 아이디어를 사고파는 시장까지 존재한다. 돈을 빌려서 기업을 만드는 창업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가치를 보고 '투자'하는 풍토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번 실패하면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기 일쑤인 환경도 문제다. 양세훈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창업이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실패 후 재도전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특별취재팀=심재우(영국 런던, 미국 팰로앨토)·구희령·손해용(중국 베이징·상하이)·김영민·조혜경(독일 베를린·드레스덴) 기자, 김현기 도쿄특파원 < jwshim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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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구희령.손해용.조혜경.김현기 기자heali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