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던진 숫자에 현혹되지 말라?

상대가 던진 숫자에 현혹되지 말라?

나도 모르는 판단의 함정, 앵커링

2005년에 처음으로 중국 출장을 갔다. 마침 주말을 끼고 가는 일정이 잡혀서 일요일은 쉴 수 있었다. 같이 간 동료가 주변 관광을 하고 싶어했다. 주재원들은 처음 중국에 왔으니 짝퉁시장에 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며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단, 가격은 상인들이 부르는 대로 주지 말고 부른 가격의 10분의 1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짝퉁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시계를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같이 간 동료가 명품 짝퉁 시계를 찾고 있던 터라 가게로 발을 들여놓았다. '불가리' 시계가 맘에 든 동료는 가격을 물었다. 상인은 재빨리 전자계산기를 내보인다. 50만원이 찍혀있다. 동료는 정품가격이 200만원을 넘는데 50만원밖에 안 한다며 좋아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동료는 주재원들에게 들은 대로 계산기에 5만원을 찍었다. 상인은 안 된다며 다시 49만원을 보여준다. 동료가 안 산다고 하니까 상인은 또다시 계산기를 내민다. 동료는 5만원에 사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계산기를 내미니 6만원을 제시할 수 밖에 없었다. 상인은 안 된다며 다시 48만원이 찍힌 계산기를 내민다. 너무 비싸서 안 되겠다며 나가려고 하자. 상인이 붙잡으며 다시 계산기를 내민다. 이렇게 한참 승강이를 하다가 결국 18만원에 시계를 샀다. 동료는 시계를 차보고 기뻐하면서 정말 잘 산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천진에서 ‘불가리’ 시계를 사고 좋아했던 동료는 3일후 다음 출장지인 심천에 도착해서 후회했다. 시계에 물이 들어가고 바늘이 시도 때도 없이 혼자 섰다 돌다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부르는 값의 10분의 1에 사는 게 정석이라니, 5만원 주고 사야 할 시계였다. 어째서 동료는 18만원에 사고도 잘 샀다는 생각을 했을까? 몇 년이 지나 행동경제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득 한 용어가 눈에 들어왔다. ‘앵커링(anchoring)’이란 용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를 잘 모르는 것을 판단할 때에 기준이 필요한데, 무의식적으로 처음 주어진 숫자를 기준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앵커링에 대해 이해하는 순간 퍼뜩 떠오른 것은 중국 짝퉁시장에서 동료가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동료는 주재원에게 10분의 1 가격에 사라는 말을 들었지만, 정작 가격 협상의 상대방인 상인이 처음에 50만원이라는 가격을 제시하자, 자기도 모르게 50만원을 판단의 기준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상인이 18만원까지 가격을 내리니 32만원이나 깎았다고 생각하며 잘 샀다고 판단한 것이다. ‘넛지’이론으로 유명한 리처드 탈러의 실험도 있다. 자, 당신의 휴대폰 번호 끝 세자리에 200을 더하여 옆의 메모지에 적어보라. 숫자를 적었으면 다음 문제를 풀어보자. 훈족의 아틸라 왕이 유럽을 공략한 연도가 언제인가? 역사를 잘 모르면 그냥 어림짐작해보라. 처음 메모지에 적힌 숫자보다 큰 연도인가, 작은 연도인가? 최대한 추정한 수치를 메모지 위 처음 적은 숫자 옆에 써보자.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당신의 전화번호와 아틸라 왕의 유럽 공략 연도(서기 411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렇다. 아무 연관성이 없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두 번째 적은 연도는 첫 번째 적은 숫자와 아무 연관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탈러 교수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실험을 해보았더니 둘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계성을 띠었다. 처음에 800 정도의 숫자를 쓴 학생들은 두 번째 연도 추정치를 700-900 사이로, 처음에 300 정도의 숫자를 쓴 학생들은 두 번째 연도 추정치를 250-400 사이로 적었다.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제일 처음 적은 숫자를 나중 판단의 기준점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앵커링을 잘 활용해서 ‘재미’를 본 사례도 있다. 모 고등학교에서 개교 77주년을 기념으로 발전기금을 모금하려 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번 모금에 10만원을 기부해 주세요’라는 문구를 적어 보낸다. 하지만 이런 문구를 이용하면 참여율이 저조하고 모금액도 적은 편이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금액을 요구하자니 아예 모금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동문회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동문 중에서 행동경제학을 연구하던 교수가 있어 동문회에 코치를 해 주었다. ‘개교 77주년을 기념하여 발전기금을 모금합니다. 기부해 주세요’라고 문구를 적어 보내란다. 동문회 임원들은 그렇게 금액을 정하지 않고 보내면 누가 모금에 참여하겠느냐며 반대했다. 이에 교수는 일단 보내보고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원래 문구로 다시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동문회 임원들은 반신반의하면서 교수의 말을 따랐다. 결과는 어땠을까? 77주년이라는 숫자 덕분에 동문 중 반 정도는 70만원 가까운 금액을 기부했다. 물론 30% 정도는 아예 기부를 하지 않았지만 평균을 계산해보니 전체 동문이 각기 30만원 정도를 기부한 것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앵커링, 당신의 판단을 조종하는 본능이다. 이제 물건을 사거나 협상을 하게 된다면, 판단을 내리기 전에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라. 상대방이 처음 부른 가격 때문에 처음 생각보다 더 비싼 가격에 사려고 하지는 않는지 말이다. <이계평 IGM 교수> * 위 칼럼은 한국경제 2011년 10월 7일자에 전문이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