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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트리오, 뉴욕 묘지서 어머니 위한 작은 음악회

권영구 2011. 5. 19. 11:24

鄭트리오, 뉴욕 묘지서 어머니 위한 작은 음악회

  • 입력 : 2011.05.17 03:00

 

모친 이원숙 여사 별세
충무로서 국밥 장사하며 외상으로 산 피아노 부산 피란때도 가져가
정경화가 데뷔 성공후 힘들다고 눈물 흘리자 "당장 그만둬라" 호통
"우리 애들 연주 연습때 기적 소리가 방해된다" 기관사 찾아가 자제 부탁

이번 주 뉴욕 퀸스의 공동묘지에서는 세상에서 한 번밖에 없을 음악회가 열린다. 정명화(67·첼리스트)·경화(63·바이올리니스트)·명훈(58·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등 '정 트리오'를 비롯한 7남매와 그들의 자녀가 함께 하는 이 음악회는 어머니 고(故) 이원숙씨를 기리는 공연이다. 소원대로, 지난 1980년 세상을 뜬 아버지 곁에 묻힐 어머니가 생전에 즐겨 듣던 멘델스존이나 브람스의 곡이 될 것 같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직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이원숙(93)씨가 15일 오후 11시 47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지병이 심해져 3년 전 귀국해 장기입원해 있던 이씨는 한 달 전부터는 아예 의식을 놓은 상태였다.

191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원산 루시여고와 배화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이씨가 자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 서울 충무로 근처에서 천막을 치고 국밥 장사하던 시절이었다. 시장에서 놀던 아이들 언행이 거칠어지자 그는 외상으로 피아노를 들여놨다. 전쟁통 부산 피란길에도 트럭에 피아노를 챙겨 떠났다. 전쟁 후엔 서울 명동에서 음식점 '고려정'을, 1960년대 미국 시애틀로 이민 가 한식당 '코리아 하우스'를 운영하며 자녀를 세계적 스타로 키워냈다.

2004년 9월 4일 어머니 이원숙씨의 86세 생일을 맞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어머니에게 바치는 음악회를 마친‘정 트리오’. 왼쪽부터 정명훈·정경화·이원숙·정명화씨.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이씨는 엄격한 관리를 통해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낸 이른바 '수퍼맘'의 원조다. 그러나 그는 닦달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극성스러운 여자'라고 주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그러나 나는 7남매를 키워오면서 한 번도 야단을 쳐본 적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무언가 칭찬을 해주었고, 잘못이 발견되면 근본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원숙씨는 1974년 본지에 연재한 수기에 이렇게 적었다.

미국 이민 초기 명훈은 스포츠에 빠져 피아노를 등한시했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며 받은 팁을 모아 할부로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놨다. 아이는 슬그머니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정경화가 1970년 런던 데뷔에 성공하고 명성을 쌓아가던 시절, 런던의 식당에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였다. 어머니가 말했다. "당장 그만두자. 너를 위해 바이올린을 해야지, 바이올린을 위해 바이올린을 해서 되겠니. 한국인의 재능을 세계에 알렸으니 이만하면 됐다." 정경화는 이후 단 한 번도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부드럽지만 뜨거웠다. "어머니는 생일·입학 같은 격식을 챙겨주는 것보다는 필요한 부분에 딱 집중해서 '셋업' 해주는 분이었다. 대담하고, 한 번 결정하면 무서울 정도였다."(경화) "어머니는 말도 안 되는 열정이라도 존중해주신 분이었다. 10명이 넘는 전문가에게 10번을 물어서 올바른 길을 안내해주셨다."(명화)

이원숙씨의 '완벽주의'는 널리 알려진 얘기. 경화 등 자녀가 이화여대에서 연주를 할 때는 근처 신촌역의 열차 기관사를 찾아가 연주시간에 기적소리를 울리지 말라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서 연주를 망치지 않도록 핸드백에 못과 망치를 넣어 다니며 연주장 의자를 고쳤다'는 소문까지 났다. 명화씨는 "그 얘기는 과장된 것 같다"고 했다.

1980년 12월 남편 정준채 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이씨는 64세에 신학대학에 진학, 70세에 목사가 됐다. 20년 지인인 유창종 법무법인 세종 베이징사무소 본부장(66)은 "그분이 70대 중반일 때, 비행기를 함께 탔는데 '프랑스에서 아들 관련 기사가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읽으려고 한다'며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계셔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1990년 세화음악장학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형편이 어려운 음악도의 학비를 댔고, 1992년 서울 주니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재능 있는 연주자도 발굴했다.

16일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던 정명화씨는 "한 달 전 경화가 중환자실에 계신 엄마 뺨에 입을 맞췄더니 의식이 없는데도 엄마가 방긋 웃었다. 그게 마지막 웃음이자 유언이 됐다"며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자식들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실 것 같다"고 했다. 이날 빈소에는 피아니스트 신수정·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씨 등 음악인과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이홍구 전 총리,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 등이 조문했다. 발인 18일 오전 11시,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02)2258-5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