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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JAPAN’ 현장을 가다 ② 전통과 기술의 공존 ‘네오 재패니스크’

권영구 2009. 9. 29. 14:57

‘COOL JAPAN’ 현장을 가다

② 전통과 기술의 공존 ‘네오 재패니스크’

[중앙일보] 2009.09.29 10:13 수정

게임기에 전통을 넣다, 젊은층이 역사에 눈돌리다

일본 교토의 테마 박물관 ‘시구레덴’에서 관람객들이 일본의 전통문학을 활용한 ‘오구라백인일수’ 게임을 즐기고 있다. 바닥의 LCD 화면 가운데, 관람객들이 들고 있는 닌텐도 게임기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찾아내면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교토=이영희 기자]

일본의 유서 깊은 도시 교토. 그곳의 작은 마을 사가노는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취가 고즈넉하다. 과거 일본 귀족들이 이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일본 전통문학인 ‘오구라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를 응용한 게임을 즐겼다. ‘오구라백인일수’는 17세기부터 유행했던 일본의 정형시 와카(和歌) 중에서 작품성이 뛰어난 100편을 엄선한 책. 이 100개의 시를 종이에 적어 펼쳐놓고 사회자가 그 중의 하나를 낭송하면, 다른 참가자들이 그 시가 적힌 카드를 재빨리 찾아내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바로 그곳에서 현대판 ‘오구라일인백수’가 탄생했다. 닌텐도 DS 게임기를 손에 든 초등학생들이 선조들이 즐겼던 옛 게임에 흠뻑 빠져있다. 닌텐도가 2006년 이곳에 세운 ‘오구라백인일수’ 체험파크 ‘시구레덴(時雨殿)’에서다. 닌텐도는 예전부터 오구라백인일수 카드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 20억 엔을 들여 전통게임을 첨단 게임기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른바 전통문화와 첨단기술의 결합이다. 일본 문화계의 새 트렌드로 떠오른 ‘네오 재패니스크(Neo Japanesque·신일본 양식)’의 모범사례다.

◆전통미를 첨단기술로 구현=일본은 2000년대 중반부터 ‘네오 재패니스크’를 새로운 문화전략으로 내세워왔다. 일본의 뛰어난 기술에 전통 문화를 가미해 국가경쟁력을 배가하겠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메이드 인 재팬’ 타이틀만으로도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었지만, 한국·대만 등 후발국의 추격으로 기술 그 자체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이 힘든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본다움’을 강조하는 이 전략은 패션·디자인·자동차·테마파크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일례로 일본 정부는 2006년 말 ‘네오 재패니스크’ 전략을 활용한 상품 및 공간 100선을 발표했다. 일본도(刀)의 매끈한 선을 응용한 도요타 자동차나, 수제 악기의 느낌을 살린 야마하의 디지털 피아노 등이 대표적 성공사례다.

◆상상력으로 부활한 과거=‘네오 재패니스크’ 바람은 일본 사회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경제적·산업적 효과는 물론 교육적 효과가 크다. 그간 역사에 관심이 없었던 일본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전통에 눈을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루에 1000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고 있는 ‘시구레덴’이 좋은 예다.

방문객 대다수는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이거나 젊은 연인들이다. 관람객들은 입구에서 나눠주는 닌텐도 게임기를 들고 박물관에 입장한다. 그곳 바닥에는 45인치 크기의 대형 LCD 70개가 깔려 있다. 관람객들은 일단 LCD 위에 올라선다. 이후 자신들의 닌텐도 게임 화면에 나타난 시가 적힌 LCD 화면을 찾아 선택하면 점수가 올라가는 방식이다. 과거 선조들이 즐기던 ‘오구라백인일수’ 게임이 디지털 게임기술과 만나 또 다른 게임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시구레덴은 2007년 경제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유수 기업 3대 박물관’에 오르기도 했다. 포브스는 “전통과 현대를 조합한 상상력의 힘”을 극찬했다. 24일 초등학생 자녀 2명과 함께 이곳을 찾은 주부 다카하시 치에(37)씨의 말이 시사적이다. “나도 잘 모르는 옛날 시와 관련된 게임에 아이들이 너무 즐겁게 참여해 깜짝 놀랐다. 젊은 세대에게 전통을 효과적으로 전하려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교토=이영희 기자



디지털의 심장 아키하바라
‘역사 오타쿠’들 몰려 활력


일본 디지털 문화의 ‘성지’로 꼽히는 도쿄의 아키하바라. 이곳에서도 ‘네오 재패니스크’ 바람은 강력했다. 최첨단 디지털 기기가 즐비한 이곳에서 요즘 일본 역사를 소재로 한 액션게임이 인기다. ‘전국 바사라’ ‘노부나가의 야망’ 등 전국(戰國)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들이 대표적이다.

또 요즘 아카하바라에는 전국시대 관련 캐릭터 상품을 파는 가게가 늘고 있다. 지난해 살인사건으로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던 아키하바라가 최근 급증한 ‘역사 오타쿠(광팬)’들의 파워에 힘입어 다시 활기를 찾는 모양새다.

24일 오후 아키하바라 중심부의 메이드 카페 ‘모노노후.’ 여종업원이 하녀 복장으로 시중을 드는 기존 메이드 카페와는 달리 이곳 종업원들은 무사 복장을 변형한 드레스를 입고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다. 카페 곳곳에는 전국시대 무사 가문을 상징하는 휘장이 걸려있다. 오다 노부나가·이시다 미쓰나리 등 장군들의 이름을 단 음료도 있다.

일본의 ‘역사 열풍’은 올 초부터 NHK에서 방송 중인 사극 ‘천지인(天地人)’의 영향이 컸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전국시대 풍 메이드 카페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본래 메이드 카페는 남성손님이 대다수지만, 전국시대 풍 메이드 카페에는 여성도 많이 찾는다.

‘레키조(歷女)’ 또한 새로운 소비층으로 부상했다. 역사 드라마나 게임에 열광하는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산케이신문은 이들을 겨냥한 시장이 향후 700억 엔(9600억원)대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 게임숍 점원은 “역사게임을 찾는 손님 중 여성의 비율이 늘고 있다”며 “역사에 무심했던 일본 젊은이들이 드라마·게임을 통해 과거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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