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밭 새벽편지(행복한 家)

[일상스토리]눈이 보이지 않는 동물과 산책을 하러 가다

권영구 2024. 8. 2. 14:06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이토록 강력한 제목이 있을까. 얼마 전 작가님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과 ‘예술’이라는 단어들이 강제결합에나 나올 것처럼 나란히 존재했다. 일 년에 수십 차례 전시에 드나들면서도 단 한 번도 시각장애인을 본 적이 없다. 단순히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래도 최근 전시들에서 촉각적 매체를 가져다 놓은 시도를 보긴 했지만 전체 전시 구성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구색 맞추기 같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애초에 미술 전시라는 개념적 공간이 맹인은 예술을 ‘보러’ 온다는 행위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거란 전제에서 시작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동물과 나누는 일상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눈이 보이지 않는’ 주체자들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 푸코에게 궁금했던 부분을 책의 주인공, 맹인이자 사진가인 ‘시라토리’씨가 대답해주곤 했다. 반대로 내가 나의 개에게 궁금했던, 그리고 자연스레 가졌던 선입견을 책의 화자도 궁금해한다.

 

예를 들면 “나는 ‘시라토리 씨는 시각 정보가 없는 만큼 청각 등 다른 감각이 엄청 날카로울 게 틀림없어.’라며 멋대로 기대에 부풀었다. (77쪽)” 같은 질문이었다. 매번 누군가가 ‘개가 눈이 안 보여서 너무 불편하겠어요.’라고 염려를 건네면, ‘대신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하지 않을까요?’라며 대충 등가교환의 법칙을 내세웠다. 시력을 잃었으니 다른 감각이 보조해 주기 위해 더 발달할 것이라는. 그에 시라토리씨는 대답한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게 있지 않느냐고 자주 듣는데, 그야 보이지 않아서 느끼는 게 있긴 해요.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까 느끼는 건, 보이니까 느끼는 것과 나란히 있는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해요. 그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고 싶다니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맹인을 미화하는 게 아닐까 싶어.’라고 기대감과 편견이 엉킨 나의 질문에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다시 눈이 보일 수 있도록 수술할 수 있으면 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냥 지금처럼 살고 싶다고. 시라토리씨는 9살 때까지는 시력이 있었다가 그 이후로 전맹이 된 경우였기에 당연히 수술을 택할 것이라 어림짐작했다. 나의 모든 추측이 보란 듯 빗겨나갔다. 푸코의 시력이 떨어지는 동안 어떻게든 그것을 지연시키고자 노력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너무 불편하지 않겠냐며 녀석을 데리고 온갖 병원을 전전했던 때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금 전국의 병원을 수소문해 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녀석도 그 치료 과정이 더욱 고통스러럽지는 않았나 괜시리 되짚어본다.

 

그 외에도 꿈에 관한 것, ‘맹인다운’에 관한 정의 등 눈이 보이지 않는 녀석을 넘겨짚었던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반대로 시라토리를 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시각이 오히려 삶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지 않냐고. 시라토리는 비장애인보다 다빈치의 그림을 더 ‘잘’ 본다. 그는 맹학교에서 안마사과정을 배웠으며, 이를 토대로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시라토리는 근육을 통해 느껴지는 촉감만으로 인체의 모양새, 부피 등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그보다 더 정확히 다빈치의 그림을 ‘감상’할 것이라는 나의 착각인 것이다.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고작 동그란 원 위에 ‘대’ 자로 사지를 벌리고 있는 남자가 전부인걸.

 

 

이처럼 이미 보았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려지는 것들이 많다. ‘시지각’이라고 하는데, 이는 눈으로 유입되는 시각 자극을 받아들인 후 자신의 과거 경험에 비추어 적절히 본 것을 해석해 내는 것을 말한다. 흔히들 자신이 대상을 ‘보았다.’라고 말하지만,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선택적 주의)에서 보듯 사람은 자신에게 관련 있는 것, 목표로 삼는 대상을 인지하고 ‘보았다’고 착각한다는 뜻이다. 정말로 순수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본 경험이 없어야 가능하다.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수백 번을 오고 가던 산책길을 푸코와 다니니 비로소 발견해 낸 것들이 많다. 빗물받이 구멍이 얼마나 큰 지, 계단의 층고가 아이들이 오르내릴 때 얼마나 높은지, 경사로가 없는 길이 생각보다 많은지, 그리고 멀쩡한 도로가 파손되어 흠이 많은지. 신체 건강한 나로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온전히 눈이 보이는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입장을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계속 더듬거리며 헤아리려고 시도한다. 단순히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짚어볼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미술관에서 장애인을 보기 어려운 것인지, 자유롭게 거리를 오 다니는 신체가 불편한 사람을 마주치기 어려운 것인지 의구심을 품는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다. 필사적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해도, 우리는 결코 다른 누군가의 인생과 감각까지는 체험할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볼 필요도 없다. 괴로움도 기쁨도 모두 그 사람만의 것이다. 그저 다가가는 것. 그리고 이 세계에서 함께 웃어내는 것."

 

덧. 맹인이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은데 ‘맹견’이라고 하니 왠지 사나워야 할 것 같다. 나의 맹견은 오히려 많이 소심한 편. 맹견 분야에서만큼은 검은 백조 같은 녀석.

 

by. 윤끼 https://brunch.co.kr/@foucault/102
(위 글은 작가님께서 행복한가에 기부해주신 소중한 글입니다. 행복한가 이 외의 공간에 무단 복제 및 도용하는 행위를 금지하며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