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알기

일본은 '실버 시장'서 골드를 캔다

권영구 2013. 11. 27. 10:05

 

[글로벌 경제 현장] 1000兆원.. 일본은 '실버 시장'서 골드를 캔다

[노인을 위한 나라의 新산업, 도쿄 안준용 특파원 르포] 게이오 백화점 8층은 시니어 전용… 부양 대상 노인들, 이젠 지갑 열어 햄버거는 식감 부드럽게 만들고 말 속도 늦춰주는 휴대폰도 등장 포장지엔 시니어 표기 안해… 거부감 없앤 마케팅으로 성공

 

조선비즈 | 도쿄 | 입력 2013.11.27 03:03

 

25일 오후 7시쯤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의 게이오 백화점 8층은 쇼핑하러 나온 '어르신'들로 붐볐다. 주로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하는 게이오백화점에서도 8층은 '시니어의 공간'으로 불린다.

이곳에는 중·장년층을 위한 한방 상담소와 한방 찻집부터 마사지 숍, 건강식품 매장, 보청기를 비롯한 의료 기기 매장 등이 들어서 있다. 고령자 취향에 맞춰 튀지 않게 디자인 된 등산 용품과 여행 가방 등도 판매하고 있고, 매장 반대편에는 이들을 위한 식당가가 운영되고 있다. 매장 종업원은 50대 이상이 대부분이고, 상품 진열대 글씨는 큼직하다. 이곳을 찾은 주부 나고야 미도리(名古屋美鳥·64)씨는 "집에서 남편과 함께 먹을 건강식을 사러 왔다"며 "나이 든 사람들이 입을 만한 속옷이나 신발도 모두 여기 있어 2주에 한 번씩은 꼭 들른다"고 했다.

↑ 안준용 특파원

↑ 백화점 한층을‘시니어 공간’으로 일본 도쿄 신주쿠의 게이오백화점 8층 시니어 잡화 매장에서 한 노부부가 여행용 가방을 함께 고르고 있다. 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한 ‘시니어 백화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시니어의 동선을 고려해 매장을 설계하고, 친근감을 느끼도록 50대 이상 종업원들을 배치하고 있다. /도쿄=안준용 특파원

 

실제로 게이오백화점 매출에서 시니어 소비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달한다. 백화점 측은 "시니어들이 지갑을 연다는 것은 곧 매출 증대를 뜻하기 때문에 그들을 생각하면서 매장을 배치하고 상품을 선별한다"고 말했다.

과거 '부양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일본 시니어들이 강력한 소비 계층으로 떠오르면서 일본 기업과 그들의 제품을 바꾸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 은퇴 시점인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된 '액티브 시니어' 시장은 일본의 고령화율과 나란히 팽창 중이다.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일본 산업의 시장 규모는 연간 100조엔(약 1050조 원)을 넘어섰다. 2200만대 이상 팔린 후지쓰사의 시니어 전용 휴대전화 '라쿠라쿠 폰' 등 일부 상품의 대성공으로 일본 기업의 변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기업들은 구매력을 갖춘 '액티브 시니어'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다양한 시니어 상품을 연구·개발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판매 전략을 세우는 데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의 유명 식품 업체 '이토햄'은 시니어들을 위한 햄버거와 소시지 등 5개 품목을 상품화, 다음 달 발매할 예정이다. 특징은 바로 '자연 식감'이다. 이가 약한 고령자들이 먹기 힘든 육류 등을 잘게 조리해 식감을 좀 더 부드럽게 하되, 본연의 맛은 유지하도록 과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시니어들이 햄버거와 소시지 같은 육류 제품의 맛을 즐기고 싶은데도, 치아나 소화 문제가 부담스러워 포기한다는 데 착안했다.

일본 매트리스 시장 점유율 1위인 '프랑스베드'와 가정용 개호(介護·돌보기) 식품 최대 업체인 '큐피'는 시니어들을 위해 판매 전략을 바꾼 케이스다.

프랑스베드는 기존 개호 용품 전문점에서만 판매하던 전동 휠체어와 전동 자전거 등을 일반 가구점에서도 팔기 시작했다. 프랑스베드 측은 "먼 거리를 이동하기 어려운 고령자들이 쉽게 물건을 보고 살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프랑스베드의 시니어 브랜드 '리하텟쿠(Reha Tech)'가 올 4~9월 올린 매출은 4억엔(약 42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큐피는 포장에 '개호 식품'이라는 표기를 없앤 반찬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큐피 관계자는 "시니어들이 실제 '개호'나 '시니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다"며 "상품 포장은 물론, 취급 판매처도 개호 전문 매장을 벗어나 일반 식품 매장으로 확대해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최근 일본 액티브 시니어의 소비 행태는 여러 특징을 갖고 있다. 다른 나라의 고령층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능숙히 다루면서 상품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높고, 가격과 품질에 더 민감하다. 또 젊음을 지향하면서 상품 구매를 통한 자아실현 욕구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분류일 뿐, 일본 시니어들의 소비 특성은 업계마다, 품목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무라타 히로유키 도호쿠대 교수는 "시니어 시장은 매스 마켓이 아니라 다양한 마이크로 마켓의 집합체"라며 "각 기업들이 시니어 시장 규모만 보고 시니어 소비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새로 세운 상품·서비스 전략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조언한다.

결국 전략 수립 단계 전, 시니어들의 소비 동향에 관한 세부적인 시장 조사·연구가 성공의 관건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