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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의실·강의·수업계획서 없는 '3無' 대학 강좌

권영구 2013. 9. 5. 14:44

[기고] 강의실·강의·수업계획서 없는 '3無' 대학 강좌

  • 조광수 성균관대학교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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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9.05 03:02

    
	조광수 성균관대학교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사진
    조광수 성균관대학교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보통 대학 수업은 교수가 엄선한 지식을 처방한 수업 계획서에 맞춰 정해진 강의실에서 한 주씩 진행한다. 그런데 필자의 학부 수업에는 이런 식의 강의실이나 강의가 없고, 그 흔한 수업 계획서도 없다. 강의실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여기저기 다녀야 한다.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콘퍼런스나 예술 전시회도 가야 한다. 지난 학기는 학생들이 융합 팀을 만들고, 전자 상가에 가서 동부대우전자의 벽걸이 미니 세탁기를 관찰하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제품은 어떤지, 판매원은 무엇을 설명하는지, 소비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인터뷰도 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촘촘한 사업 계획서를 작성케 했다. 그다음 주에는 벽걸이 세탁기 상품 기획자를 초청해 특강을 했다.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며 제품 분석과 마케팅 기획을 해보았기에 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현업 전문가에게는 아직 치기 어린 질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질의응답은 저녁 식사와 뒤풀이 자리까지 이어져 7시간이나 진행됐다.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까. 학생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미천한지 깨달으며, 작지만 소중한 '실패'를 배운다. 여기서 깨달은 무지의 내용이 바로 다음 주 수업의 주제가 된다. 이렇게 한 주씩 불확실한 현실을 풀어나간 문제 해결 과정의 경험을 기록하면서 소위 강의 계획서가 완성되어간다.

    내 수업에선 교수가 일방적으로 정한 지식을 전달하려 하기보다, 학생의 필요와 동기에 따라 역동적으로 학습을 설계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특히 전통적 형식 교육의 한계를 넘어, 정보와 지식을 끊임없이 익히고 활용해야 하는 우리 삶의 비형식적 교육을 끌어안고자 하는 융합 학습법이다. 이 때문에 페이스북이나 구글플러스 같은 SNS를 이용해 '김밥의 사용자 경험'같이 생활 속 에피소드와 수업을 연결해 토론을 하기도 한다.

    이 시대는 불확실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심지어 본질적 가치도 바뀐다. 한때 올바르던 지식은 뒤도 안 돌아보고 퇴화하며, 새로운 지식과 가치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시대는 불안하다. 정년퇴직은 몇몇 특수 직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고, 100세 시대를 살게 될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70년쯤은 더 살아야 한다. 이런 세상에선 다양한 지식을 융합하며 문제를 분석하고 정의하는 자율성과 창의적 문제 해결 역량,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자신감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이 수업에선 인지 과학과 사용자 경험을 기반으로 상품과 서비스, 기술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방법을 배운다. 겉멋 든 해결책보다 사람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관찰, 문헌과 사례 분석을 기반으로 한 창의적 해결책이 중시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패를 요구받고 반복적으로 수정한다.

    이제 대학은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없다. 대신 지식 융합과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해 보는 연습 공간, 실패를 인정하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은 자율과 창의로 시도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고 또 시도한다. 사회에 나가서 실패하며 배우기에 세상은 너무 빠르고 혹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