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일본 긴자 미쓰코시백화점과 신주쿠 다카시마야백화점. 입구에 들어서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점원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층 화장품, 잡화 매장부터 패션, 스포츠, 아동 매장을 차례로 둘러봐도 손님이 없어 한산했다. 시간대를 막론하고 사람들로 붐비는 국내 백화점을 떠올리면 생소한 모습이다. 간간이 보이는 고객들은 50∼60대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백화점이 위기다. 일본 백화점협회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전국 백화점 매출은 6조5842억엔(약 82조44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0.8% 줄어들면서 12년 연속 매출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백화점 점포 수는 1999년 311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이후 계속 줄어 지난해 말 271개가 남았다. 이세탄백화점 기치조지점을 포함해 세이부백화점 유라쿠초점 등 올해만 10개의 백화점이 문을 닫는다.
일본 백화점은 나이가 들었다. 백화점을 찾는 고객이나 그들을 응대하는 점원 모두 중장년층이 많다. 장기불황 때문에 소비자들은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찾는데 백화점은 고품질·고가격 정책만 고수했다. 그 결과 패션과 트렌드를 주도하는 20∼30대 젊은 고객들이 외면하는 곳이 돼 버렸다.
젊은 사람들은 쇼핑몰과 패션빌딩으로 몰린다. 롯폰기의 미드타운이나 긴자의 오모테산도 힐스는 개성 넘치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특히 명품 번화가의 대명사인 긴자 지역은 최신 유행 상품을 중저가에 재빨리 내놓는 SPA(제조·유통 겸업) 브랜드 업체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실속파 고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유니클로’가 긴자점을 연 데 이어 연말에는 미국의 중저가 의류업체 ‘아베크롬비&피치’도 둥지를 틀었다. 2008년에는 스웨덴의 ‘H&M’이 일본 첫 매장을 긴자에 냈고 스페인의 ‘자라’도 진출했다. 패션감각은 뛰어나지만 주머니는 얇은 젊은 고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백화점도 변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신주쿠에 위치한 이세탄백화점은 지하 2층 전체를 ‘이세탄 잇 걸(Isetan It Girl)’로 꾸몄다. 브랜드 간 경계가 없이 매장이 오픈돼 있고 곳곳에는 10∼20대 여성이 좋아할 만한 각종 캐릭터 상품이 진열돼 있다. 엄마와 함께 백화점을 찾은 자녀들의 동시구매를 유도하는 것이다.
식품매장 강화도 그 중 하나다. 일본 백화점의 식품매출 비중은 25%로 국내 10%와 비교하면 높은 수준이다. 마트에선 볼 수 없는 아기자기한 델리(조리된 음식을 파는 가게)와 깔끔한 소포장은 백화점 식품매장의 강점이다. 어느 백화점이든 지하 1층 식품매장은 고객들로 붐볐다.
70∼80년대 한국은 일본에 가서 백화점의 상품 구색과 서비스를 통째로 베끼다시피 해 영업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국내 백화점 업계는 지난해 사상 최대의 매출(21조5484억원)을 올리며 전년 대비 10.5% 성장했다. 일본 유통업계의 최근 화두는 ‘한국 백화점 배우기’다.
이철우 롯데백화점 사장은 지난 3월 일본소매업협회가 개최한 ‘제20회 유통교류 포럼’에 참가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강연을 했다. 한국 백화점이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비결에 대해 그는 “고객의 요구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발맞춰 백화점, 대형마트, 슈퍼, 편의점, 인터넷쇼핑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영플라자, 에비뉴엘, 아웃렛 등 복합쇼핑몰로 진화하고 있는 것”을 꼽았다.
1997년 외환위기도 백화점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 백인수 롯데백화점 유통전략연구소장은 “외환위기 때 120개가 넘던 국내 백화점이 80개로 재편되는 등 개혁이 불가능한 기업은 자연스럽게 도태됐다”며 “위기를 극복한 기업은 세계 시장과 맞설 수 있는 경쟁력을 길렀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