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머니는 엄마가 갓난아기일 적에 집을 나가셨다. 집을 나가시기 전, 외할머니는 막내딸이었던 엄마를 데려가려 하셨다. 그러나 증조할머니께서 엄마를 다락방에 숨기셨고, 외할머니는 결국 홀로 집을 나가셨다. 그 이후 엄마는 어머니 없이 다른 가족들과 사셨다.
엄마는 너무 어린 나이에 당신의 어머니와 분리되었다. 다른 가족들은 엄마에게 어머니 같은 사랑을 주지 못했다. 그건 엄마를 평생 괴롭힌 불안의 씨앗이 아니었나 싶다. 어린아이에게 주 양육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엄마는 평생토록 그 자리를 채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허전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어릴 적 기억은 많지 않다. 그 기억들은 모두 서러웠거나 억울했던 기억들뿐이다. 엄마가 4~5살 남짓이었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당신은 나가야 하니 문간방에 있으라며 미군 부대 분유 하나를 주고 가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께서 나가셨을 때는 분명 낮이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 문간방은 세를 들어 사는 남의 집이었다고 한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혼자 덜덜 떨었다고 한다.
그때의 공포는 엄마에게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혼자 남는 것이 너무 두렵다고 말하는 나의 엄마. 이러한 기억이 엄마가 평생을 버려지지 않으려 애쓰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엄마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사생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그림에 소질이 있던 엄마는 대상을 받아다. 그리고 같은 반 남학생은 장려상을 받았다. 엄마는 사생대회의 부상으로 크레파스를 받았다.
크레파스가 매우 귀했던 시절, 엄마는 그 크레파스를 소중히 안고 집에 왔다. 여러 색의 크레파스 중 하나만 꺼내어 줄만 쓱 그어보고는 다시 소중히 넣어 보관했다고 한다. 어느 날, 장려상을 받은 아이의 학부모가 학교에 찾아왔다.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엄마는 그 아이 학부모가 봉투 비슷한 것을 선생님께 주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후 엄마의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크레파스를 썼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엄마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담임선생은 엄마에게 당장 집에 가서 크레파스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엄마는 수업시간 도중 혼자 큰길을 건너 집으로 갔고, 크레파스를 가지고 왔다. 담임선생님은 엄마에게서 크레파스를 빼앗아 장려상을 받은 아이에게 주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신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서러워하신다. 그 기억은 적잖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 든든한 내 편이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고 한다.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항의해주고 감싸줄 이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엄마는, 그 이후 그림 그리기 싫어졌다고 한다.
엄마의 인생을 돌아보고 나서, 엄마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나에게도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늘 버려질까 두려워했고, 엄마의 자리를 누군가의 사랑으로 채우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리고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열심히 살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늘 혼자 남을까 두려워했고,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려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늘 당신에게는 자신감이 없으셨다. 엄마의 결핍을 듣고 느끼고 나니, 나와 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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