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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정상회담이 쇼일까

권영구 2018. 5. 8. 09:06

[태평로] 정상회담이 쇼일까


입력 : 2018.05.08 03:15

세계 최대량 우라늄 묻혀있는 땅 '항구적 비핵' 어떻게 보장받나
핵 개발 後 지원 뜯어내는 수법은 봉이 김선달과 무엇이 다른가

김광일 논설위원
김광일 논설위원
대부분 세상 일은 이벤트일 때가 있다. 부모님 가슴에 5월 꽃을 달아 드려도 그렇다. 꽃은 본질적으로 이벤트다. 선입견을 갖고 볼 일은 아니다. 대개 정상회담은 쇼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을 노정한다. 화동에게 꽃 받는 것부터 그렇다. 아동 인권침해 아니냐고 까칠하게 굴 필요 없다. 때로 노벨 위원회가 지켜보고 있다. 다만 정상회담 앞에 붙는 '역사적'이라는 수사는 매우 '비(非)역사적'으로 들린다. 진실은 '역사적'이지 못한 영역을 배회한다.

엊그제 선배랑 토론이 붙었다. "자네는 지금 상황을 어찌 보는가." 나는 "북핵 폐기 쪽으로 연착륙한다는 낙관과, 동북아는 결국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하는 쪽으로 핵 균형을 찾을 것이란 비관, 두 주장이 맞붙은 형국"이라고 말했다. 선배는 나를 유아적 낭만주의라고 힐난했다. 선배는 말했다. "이 사람아, 지금 형국은 주한미군과 참여연대가 맞붙은 형국일세." 얼큰하게 취기 오른 농담이었기에 심각하게 듣진 않았다.

오래전 캐롤 자코우스키라는 수녀가 책 '삶을 위한 10가지 제안'을 썼다. 캐롤은 남들보다 재미있게 살라고 거듭 충고했다. "재미도 있고 십계명에도 위배되지 않으면 당장 실천에 옮기라"고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 것, 나눠 가질 것, 정말 재미있게 살 것, 용서하고 잊어버리며 살 것, 그냥 내버려 둘 것', 구구절절 와닿았다. 훌륭한 신이 하는 일은 '기다리게 한다'이고, 훌륭한 신이 하지 않을 일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준다'라고 했다. 나는 지금 이것조차 정치적 키워드로 읽히는 농담병을 앓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 버트런드 러셀, 존 케인스 같은 깨친 사람들이 회원이었던 20세기 초 영국 블룸즈버리 모임은 끊임없이 농담을 해대던 엘리트 그룹이었다. 농담은 정신의 가장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드러낸다. 농담은 상대의 심장을 꿰뚫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얼마 전 도쿄에 갔더니 고양이를 어깨에 올려놓고 다니는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유행처럼 보였다. 숫제 강아지만 한 고양이를 목에 두르고 다녔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하인인지 헷갈렸다. 지난 금요일 시진핑과 아베가 전화 통화를 했다. 중·일(中日) 정상 통화는 역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차마 '역사적'이란 형용사는 민망했던지, 재팬타임스는 '랜드마크적인' 통화라고 했다. 아베가 전화를 걸자 시진핑이 받았고, 40분 통화를 했는데, '솔직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소외된 이웃의 뒷담화처럼 들렸다. 누가 고양이였을까, 궁금했다. '남·북·미(南北美)' 정상을 빗대면 누가 누구 어깨에 올라탄 고양이일까.

지난주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만기 출소하면서 "지금 (감옥 밖으로) 나오지만 (진짜) 감옥이 저 안인지 밖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노장(老莊)을 흉내 낸 범상치 않은 슬픈 농담처럼 들렸다. 오바마가 핵 없는 세상을 꿈꾼 '순진한 농담가'였다면, 트럼프는 중동 비핵화가 쉬울까, 한반도 비핵화가 쉬울까 끊임없이 재보는 '저울질 만담가'다.

'히로시마' 이후 세계는 '핵 있는 평화'를 73년째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핵 폐기는 무슨 수학적 가설 증명 같다. 수학 증명은 현실에 없는 추상 세계다. 세계 최대량 우라늄이 묻혀 있고 핵 과학자 수백 명이 살고 있는 땅에 어떻게 '항구적' 비핵 보장을 받아내나. 초등생 아이는 국제사회가 수십 년 말리던 핵개발을 한 뒤 그걸로 수천억달러를 뜯어내는 북(北) 스토리를 이해 못 했는데, 대동강물 팔아먹은 김선달 얘기를 해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은 당대성(當代性)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07/201805070159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