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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新한·일전'이 준 감동

권영구 2018. 3. 8. 15:00

[기자의 시각] '新한·일전'이 준 감동

입력 : 2018.03.01 03:13

장민석 스포츠부 기자
장민석 스포츠부 기자
1997년 9월 28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 고교 3학년이던 기자는 두 달여 남은 수능시험 준비차 일요일 학교로 나갔다. 오후 2시 우리는 일제히 책을 덮었고, 교실 한 구석 TV 전원에 불이 켜졌다. 도쿄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간의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때문이었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0―1로 뒤지던 한국 축구가 서정원과 이민성의 연속 골로 극적인 역전을 이뤄내자 중계 캐스터는 흥분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반드시 물리쳐야 할 상대인 일본을 꺾은 데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선수들이 "이기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비장한 각오로 임한 이 경기는 '도쿄 대첩'으로 불렸다.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준결승전에서 이승엽이 일본을 상대로 역전 투런 홈런을 쳤을 때 한 해설위원은 "지금 타구는 독도를 넘긴 것 같다"고 했다. 역사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국과 일본의 스포츠 대결은 이처럼 단순한 운동 경기가 아니라 국가적 사명감을 갖고 임하는 일종의 대리 전쟁 같았다.

지난달 18일도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강릉 스피드스케이팅장에선 올림픽 역사를 장식할 명장면이 연출됐다. 여자 500m에서 3연속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한 이상화는 은메달이 확정되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울음을 멈추지 못한 그가 새로운 챔피언 고다이라 나오(일본)에게 다가가 안겼다. 한국말로 "잘했어"라고 이상화의 어깨를 두드려준 고다이라는 "널 여전히 존경해"라며 웃었다. 이상화도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화답했다.

둘의 따뜻한 포옹을 보며 관중석의 많은 팬도 감동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고다이라는 "일본과 한국 사이엔 국경이 있지만, 이를 넘어 우정의 레이스를 펼쳤다는 사실이 많은 분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고 했다.

컬링 한·일전도 큰 화제였다. 일본 최대 양파 생산지인 기타미시(市) 출신의 미녀 스킵 후지사와 사쓰키와 마늘의 고장 의성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안경 선배' 김은정은 준결승전에서 각자 팀을 이끌며 피 말리는 승부를 펼쳤다. 8대7 한국의 승리로 끝난 뒤 후지사와는 "자신감 넘치는 김은정이 존경스럽다"고 했다. 김은정도 "후지사와는 모든 것이 준비된 스킵"이라고 상대를 치켜세웠다 .

젊은 한·일 스포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경쟁한 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에 양국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서로 죽일 듯 달려들었던 예전과는 다른 훈훈한 한·일전(戰)에 팬들은 '정치에선 만들지 못하는 스포츠의 우정'이란 반응을 보인다. 평창에서 감동을 선사한 '신(新)한·일전'이 꼬여 있는 한·일 관계 해결에 힌트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8/20180228026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