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밭 새벽편지(행복한 家)

[문화생활정보]우리 삶엔 무의미한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다

권영구 2024. 12. 12. 09:40

나는 시간 활용에 서툰 편입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면 "사무실을 따로 빌리셨어요? 집에서 하세요? 집이면 일 모드로 변경하기 어렵지 않나요? 저는 정신이 분산되어서 일에 집중을 못 할 것 같아요. 자기관리가 정말 철저하시네요."라는 감탄을 듣곤 하는데, 성실하게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이 못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나는 그저 일과 사생활의 분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이런 생활에도 장점은 있습니다. 가끔 집중력이 이상할 정도로 좋을 때는 새벽이든 한낮이든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습니다. 회의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다음 날 몇 시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걱정이 거의 없어서 좋습니다. 그래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때의 상쾌함, 충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일을 질적으로 양적으로 다 순조롭게 하는 사람은 대체로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잘 자고 잘 먹고 집중하는 리듬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머리도 잘 안 돌아가니까 규칙적인 생활이 최고라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해서 규칙적으로 살 마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조깅을 하고 마라톤을 한다는 말에 한때 ‘장거리 달리기와 글쓰기는 비슷하다.’라는 사상이 작가 세계에 퍼졌고, 친한 친구들도 영향을 받아 조깅을 시작했는데 말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조깅을 하는 건 자유지만, 가능하면 그런 건 숨어서 해주면 좋겠습니다.

문장력이 별로 뛰어나지도 않고 조깅도 하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도 하지 않는 나와 달리, 마감을 칼같이 지키고 문장력이 뛰어나면서 마라톤에 참가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존재는 정말이지 곤란합니다. 아무도 나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교하지 않으니까 안심이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 무라카미 하루키를 따라하면서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나만 타락한 생활을 하며 남겨질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규칙적인 생활만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활용하는 면에서도 엉망인 편입니다. 뭘 하고 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아주 많습니다. 메일로 받은 청구서를 열었을 뿐인데 왜 나도 모르는 사이에 30분, 한 시간이 지난 걸까. 차를 마시며 잠깐 멍하니 있었을 뿐인데 왜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휴대폰을 손에 들고 SNS를 보며 낭비한 시간은 과연 몇 시간이나 될까… 그 시간이라면 하드디스크에 쌓인 영화도 소화할 수 있고 책도 한 권이나 두 권쯤은 읽었을 테고, 허송세월하는 시간에 다른 유의미한 일도 할 수 있었을 테고, 오락이라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딱히 의미도 없고 기쁨이나 즐거움도 없는 시간이 사막의 모래처럼 살랑 살랑 바람에 흩날려 내 앞에서 사라져 갑니다.

 

멍하니 넋을 놓기 시작하면 10분쯤 후에 '이 이상 멍하니 있 을 거면 영화라도 보는 게 좋지 않겠어?'라고 알려 주는 알람이 몸에 내장되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건 안 달려 있나 봅니다.

 

분명 이렇게 보내는 시간은 무의미할 뿐인데, '됐으니까 한동안 멍하니 있게 해줘, 시간을 의미 없이 쓰게 해 줘‘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일이나 다른 문제로 머리가 복작복작하고 영화나 책에 빠져들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고, 그렇다고 금방 잠이 들 정도로 편안하지도 않고,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침착하지 못한 시간. 무의미하다고 알고 있으면서 시간을 그저 보내기 위해서 멍하니,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침착해질 때도 있죠.

 

 

그런 시간도 종종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집에 사람을 초대할 때면 왠지 불안해집니다. 이 '해이한 생활'이 방 여기저기에 묻어 둔탁한 공기를 내뿜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죠.

물론, 실제로 해이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겠지만, 왠지 생기 넘치게 사는 사람의 방은 공기도 청량한데 우리 집 공기는 정체되어 있을 것만 같고… 그런 기분이 들어서 허둥지둥 청소를 하고 정리를 시작하는데, '겉만 말끔하게 포장하는 느낌을 지울 순 없습니다.

일을 팔팔하게 하고 뭔가에 오래 집중하는 사람일수록 방이 어질러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충실한 공기'가 차 있을 것 같습니다. 어수선해도 생생한 기운이 가득 차서 에너지 넘치는 방이지 않을까요.

 

매일 무의미하지 않고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건 너무 무거운 짐이지만, 적어도 지금 내게 필요한 것, 집중하는 것이 있는 '생기가 깃든 방'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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