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하나 없는 명품 수선공 "자식도 모르게 전재산 기부"
조선일보
2020.06.13 03:00
[김미리 기자의 1미리]
전남대에 12억원 기부한 김병양 명동스타사 회장
짝퉁 루이비통 백을 멘 수선공 골방 사무실이 있는 명동의 옛 여관 건물 복도에 김병양씨가 섰다. 어깨에 멘 가방은 직원이 만들어준 '짝퉁' 루이비통 가방. 50년 가까이 명품 수선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명품 살 여유도, 관심도 없었다. "짝퉁인지, 진짜인지가 뭐가 중요합니까. 짝퉁도 소중히 다루면 진짜 못잖죠." 그가 명품이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8일 낮, 계절을 새치기해 찾아온 찜통더위에 명동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저 멀리서 육척(六尺) 거구 김병양(84)씨가 손짓했다. "여기요, 여기." 그를 따라 명동 중앙우체국 옆쪽 후미진 골목길로 들어서자 쓰러질 듯한 옛 여관 건물이 나타났다. 빛 한 점 안 들어오는 3평짜리 그의 골방 사무실이 거기 있었다. 눅눅한 냄새가 진동했고, 낡은 가죽 소파는 푹 꺼져 있었다.
김씨는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건너편에 있는 명품 수선집 '명동스타사' 회장이다. 지난 4월 온갖 매스컴을 달군 화제의 인물이었다. 뉴스 타이틀은 '수선의 달인'이 아니라 '기부 천사'. 평생 모은 12억원을 전남대에 기부해, 미담(美談) 주인공으로 조명받았다.
사무실은 거액 기부자의 공간치고는 옹색했다. 박물관으로 직행해도 될 법한 손때 묻은 구두 수선용 재봉틀이 눈에 띄었다. "다 처분하려고 했더니만 이건 사겠다는 사람이 없네요. 70년 넘은 건데 이래 봬도 아직 쌩쌩해요." 그가 손잡이를 돌리자 녹슨 재봉틀이 느릿느릿 바늘을 밀어냈다. 노쇠한 기계를 닮은 노인이 가슴 저 아래 묵혀둔 이야기를 느릿느릿 길어올렸다.
기부는 현실이다
몇 달 전 전남대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서울에서 자수성가한 노인이 거액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긴가민가했어요. 우리 학교 졸업생도 아니고, 기부 의사 밝혔다가 철회하는 어르신도 꽤 있거든요." 전남대 이순곤 대변인이 그때를 떠올렸다. 반신반의하며 확인차 서울에 올라온 그는 김씨의 골방 사무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검소하게 사시며 모아주신 돈인데 1원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몇 번이나 곱씹어 보게 되더군요. 절로 숙연해졌습니다."
12억원 중 6억원은 현금으로 대학 측에 이체했고, 지금 사는 시세 6억원 상당의 연립주택은 사후(死後) 기부하기로 했다. 전남대 68년 역사상 개인 기부자로는 가장 큰 금액(공동)이다. 몇 해 전 12억원을 기부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학교 동문이었다.
오래된 철제 책상에서 김씨가 주섬주섬 두유를 꺼내 기자에게 건넸다. 고령 탓에 손은 떨렸고, 걸음은 불편했다. 청력은 희미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평생 모은 돈을 왜 기부하셨습니까.
"거시기, 어쩌다 봉께 그렇게 됐어요. 허허." 짙은 남도 사투리 끝에 짧게 뱉은 웃음이 허공에서 메아리로 돌아왔다. 숨을 고르고 그가 말을 이었다.
"제가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집안 형편이 안 좋아 국민학교 마치고 바로 일을 했지요. 아는 게 부족해 살면서 애로 사항이 많았어요. 40~50대쯤 나중에 형편 되면 학교에 기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식이 4남매인데 다 시집 장가 보냈어요. 이 정도 뒷바라지했으면 됐다 싶었습니다. 사실 애들이 잘 안 풀렸어요. 그래서 기부 생각을 더 했지요."
―자식들이 안 풀렸는데 기부를 생각했다고요? 편법을 써서라도 자식들한테 재산을 더 물려주려는 사람도 있는데요.
"손 벌리는 자식들한테 돈 줘서 날려 버리느니 어렵게 공부하는 애들 주는 게 더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사(巨事)는 지난 3월 갑작스레 도모했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매년 3월 1일 고향(전남 장성)에서 문중 제사를 지내요. 올해도 때맞춰 내려갔는데 그놈의 코로나인지 뭐시기인지 때문에 갑자기 제사가 취소돼 버렸어요. 거기 사는 5촌 조카(김정규 전남대 겸임교수·60) 집에 하룻밤 묵었는데 그때 계획을 말했어요."
잠들기 전 조카를 불렀다. "정규야, 내가 할 말이 있다. 이제까지 모은 재산을 학생들한테 남기고 싶은데 방법을 좀 알아다오. 조건이 하나 있어. 가족들이 중간에 알면 무산될 수도 있으니 성사될 때까지는 비밀로 해주게." 정규씨는 귀를 의심했다. "일이천만원도 아니고 12억원을? 공부도 많이 안 하신 분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었어요. 몇 번이나 여쭤봤는데 뜻이 확고했습니다."
지난 4월 전남대에 장학금을 전달했을 때까지 조카는 함구했다. 김씨는 "안식구(정정애·81)가 살짝 치매 증세가 있어 망설이다가 정신이 좀 괜찮을 때 말했더니 동의하더라. 원래는 지금 사는 무악동 22평짜리 연립주택도 처분해서 이번에 같이 기부하려고 했는데 집은 우리 죽고 주자고 해서 사후 기부로 바꿨다"고 했다.
김병양씨가 청춘을 바쳐 일군 명품 수선집 '명동스타사' 내부 모습. 지금은 큰딸이 물려받았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자식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황당해합디다. 애들 입장도 이해 가지만 좋은 일 하는 거니까 이해하라고 했어요. 내가 번 돈 내가 기부하겠다는데 지들이 어쩌겠어요(웃음)." 자식들은 기사로 소식을 접했다. "기사 나가는 날 아침에 아버지가 신문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마음을 그렇게 가지셨다는 건 대단한 일이죠. 그래도 자식들하고 한마디 상의는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는 큰딸 미례(60)씨는 아버지 뜻을 존중하면서도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고생해서 번 돈인데 아깝지 않습니까.
"은행 가서 통장을 만들어 이체했어요. 뼈 빠지게 고생해서 번 돈이 한꺼번에 확 빠져나가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아쉬운 마음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컸습니다."
―전남대하고는 인연이 있나요.
"중학교 안 가고 시골에서 농사지었어요. 그러다 당숙이 광주에서 하던 식용유 공장에 들어가 일했는데 그 공장이 전남대(전신 도립농과대학 추정) 앞에 있었어요. 일하다가 가끔 교정에 들어가 보기도 했어요."
계약서 사인하러 학교 간 날,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가 중학교는 꼭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어머니가 어려운 형편에도 당신 입에 음식 들어가는 거보다 동네 사람들 먹이는 걸 좋아하셨어요. 심성이 그리 고우셨답니다."
―선생님한테 그 유전자가 대물림됐나 봅니다.
"그런가요(웃음)."
"수선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전체를 꼼꼼히 살펴보는 겁니다. 인생도 매사 찬찬히 둘러봐야죠." 김병양씨는 "수선과 인생은 묘하게 닮았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명품 하나 없는 명품 수선공
명품에 관심 있는 중년 이상 연배에게 명동스타사는 익숙한 이름이다. 1953년 명동 입구 옛 코스모스 백화점(현 눈스퀘어) 바로 옆 건물 모퉁이에서 시작한, 67년 전통의 명품 수선집이다. 김씨는 1970년대 가게를 인수해 50년 가까이 운영했다. 여전히 노익장 과시하는 현역이다. 명동 본점은 몇 해 전 옛 가게 건너편으로 장소를 옮기고 큰딸에게 물려줬지만, 구로동 공장은 직접 관리한다. "오랜 고객인 제일모직의 제품 수선을 지금도 도맡아 한다"고 말했다.
―서울엔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1960년대 식구들 데리고 상경했습니다. 어머니가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도와주셨죠. 처음엔 남산국민학교 앞에 있던 사촌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배달 일을 했어요. 자전거에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싣고 명동 가게들에 배달했어요."
180㎝ 건장한 체격으로 몸 쓰는 일이라면 다 했다. 겨울엔 난로용 석유를, 여름엔 커다랗게 자른 얼음 덩어리를 날랐다. 60년대 명동은 장안의 멋쟁이가 모이는 최고 번화가였다. 김씨는 극장, 다방, 양장점이 빼곡히 들어 있는 명동 골목을 자전거로 누볐다.
10여년 밤낮없이 착실히 일했더니 통장에 돈이 제법 쌓여갔다. 1970년대 어느 날, 기름 배달하며 알게 된 명동스타사 수선 기사가 주인이 건물을 내놨는데 인수하면 괜찮을 거라고 귀띔해 줬다. "당시만 해도 극소수 부유층만 드나들던 곳이라 오며 가며 보니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빚도 좀 지고 해서 무리해서 인수했지요. 그러면서 고생길이 열린 게지."
배달 일로 뭉툭해진 손끝을 섬세하게 단련해야 했다. 기존에 있던 수선 기사들한테 짬나는 대로 손기술을 배웠다. 신설동 가죽 공장 돌면서 가죽 떼오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사모님도 생활 전선으로 나오셨다고요?
"우리 안식구가 손기술이 진짜 좋았어요. 면도칼로 쭉 그어서 지갑만 쏙 빼내가는 '쓰리꾼(소매치기)'들이 활개칠 때였는데 안쪽에 가죽을 덧대 감쪽같이 고쳤어요. '쓰리 땜 아줌마'로 이름 날렸어요."
사모님들 사이에 알음알음 알려지더니 지방까지 소문이 퍼졌다. 지방에서 찢어진 명품 가방을 신줏단지 모시듯 안고 기차 타고 올라와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일감이 한 트럭씩 몰려왔다. 백화점 명품 매장도 AS 들어온 물건을 맡겼다. 유럽 본사에 보내면 몇 달 걸릴 게 김씨네 가게에선 며칠 만에 뚝딱 해결됐다.
―가게에 명품이 넘쳐 났겠습니다.
"루비똥(루이비통), 사넬(샤넬), 구찌, 악어백…. 그때 돈으로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이 가게에 넘쳤는데 매일 그런 것들에 파묻혀 지내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감이 없어져 버렸어요."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었습니까.
"70년대 청와대 직원이 박정희 대통령 구두를 가지고 와서 밑창에 고무창을 덧대고 사이즈도 늘려 가곤 했어요. 체구가 작으셔서 발도 자그마하셨죠. 백선엽 장군 부부는 직접 가게로 오셨는데 고생한다면서 직원들한테 커피를 사주셨지요. 배우 황정순씨는 악어백 고치러 자주 왔고요. 몇 해 전 제주도 한 박물관에 갔더니 황정순씨가 기증한 악어백이 전시돼 있던데 한눈에 제가 고친 백이란 걸 알겠더군요."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도 기사를 보내 구두 수선을 맡겼다. '여로' 주인공 배우 장욱제, 가수 하춘화 등 연예인 단골도 많았다.
―맡기는 물건에도 가짜가 있었나요?
"남편이 외국 갔다가 사온 귀한 거라면서 고이고이 가져온 가방인데 가짜일 때도 종종 있었어요. 그냥 모른 척했어요. 가짜란 거 뒤늦게 알아 그 집 사달 낼 필요는 없으니까요. 남편 정성에 고마워하는 아내 마음에 금 가게 할 수도 없고. 조용히 나만 알고 넘어가는 거죠. 수리비도 제값으로 받고(웃음)."
―명품도 즐겨 쓰나요?
"에이, 우리 같은 사람한테 명품이 왜 필요하겠어요. 평생 하나도 안 샀습니다. 집사람도 없고요. 온종일 가게에 붙어 일했는데 그런 거 살 기회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수선 맡겼다가 안 찾아가는 거라도 있었으면 들어봤을 텐데 지금까지 안 찾아간 물건이 하나도 없었어요(웃음). 참, 저거 하나는 있네요."
시멘트벽에 걸린 가방을 빼서 보여줬다. 루이비통 모노그램 패턴으로 된 낡은 크로스백이었다. "우리 직원이 몇 해 전에 들고 다니라면서 만들어준 가방이에요. 진짜는 아니고." 한평생 사치품 고치며 살아온 그가 선택한 가장 큰 사치는 기부였다.
―거리에서 짝퉁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딱 보면 짝퉁인지 압니다. 그 사람들도 들고 싶으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진짜인지, 짝퉁인지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짝퉁도 자기 마음에 들어 아껴 쓰고 소중하게 여기면 진짜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요."
―부침(浮沈)도 있었습니까.
"엎었다 뒤집었다를 몇 번 했는지 몰라요. 누전으로 불이 두 번 났습니다. 수백만원짜리 가방, 신발이 몽땅 타버렸지요. 그때 보니 사람들 심성이 고스란히 드러납디다. 어서 빨리 물어내라고 고함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괜찮으니 빨리 털고 일어나라며 변상을 원치 않는 단골도 있었습니다. 이해해준 단골 덕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많이들 고치러 옵니까.
"예전엔 귀했으니 아끼고 소중히 다뤘지요. 우라(안감)가 다 뜯어진 걸 가지고 와서 몇 번이나 바꿨어요. 엄마가 딸한테 물려주고, 딸이 다시 딸에게 물려주고. 3대째 우리 집 찾아오는 손님도 많았습니다. 요즘은 너도나도 드니 명품이 예전 명품이 아니에요. 수선해 쓰는 사람도 드물고." 덩달아 사업도 쪼그라들었다. 15년 전만 해도 직원이 30명 넘었지만 지금은 두 지점 합쳐 일곱 명 정도밖에 안 된다. 코로나가 터지고 명동 매장엔 하루 한두 사람만 찾아온다고 했다.
70년 넘은 구두 수선용 재봉틀을 작동하는 모습.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생도, 수선도 한 번 할 때 잘해야
―명품 수선집이라는 게 독특한 공간 아닙니까.
"신기한 곳이지요. 터지고 고장 난 거 수리하느라 가게 안은 아수라장인데 돈 없는 사람은 근처에도 못 와요. 수선공들은 초졸, 중졸이던 시절에 손님들은 고등학교, 대학교 나온 사람들이었어요. 물론 돈 있다고 모두 인품이 훌륭한 건 아니었어요. 가끔 우리를 막 대하는 사람도 있었죠. 억울해도 '저 사람이 저 지위까지 올라갔을 땐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어요."
―명품 수선하고 인생하고 닮은 점이 있을까요.
"고칠 때 잘못 고치면 안 고치느니 못합니다. 요쪽을 하면, 저쪽도 맞춰야 해요. 이리저리 전체를 꼼꼼히 둘러봐야 합니다. 인생도 그래요. 여기저기 실수는 없나 매사 찬찬히 둘러봐야죠. 수선은 순전히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이라 정직해요. 큰돈 벌기는 어려워도 거짓말은 안 합니다. 정성 들인 만큼 나옵니다."
―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이거 해서 아들딸 시집 장가 보내고 남에게 손 안 벌릴 만큼은 살았지요. 기부하고 죽을 때까지 먹고살 돈도 아주 조금 남겨 뒀고요. 이만하면 됐지요. 돈, 그거 다 들어왔다가 또 그렇게 나가는 거 아니겠어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그런 거 없어요." 장학금 건네받고 대학 측에서 김씨더러 장학생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도 김씨는 피식 웃으며 말했단다. "그런 거 없어요.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고만 해주세요." 학교 관계자는 "요구 사항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분은 처음 봤다. 건물에 회장님 이름을 남기든 어떻게든 기릴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만족은 천부적인 부(富)요, 사치는 인위적인 빈곤(Contentment is natural wealth, luxury is artificial poverty)"이라고. 그는 마음의 부를 타고난 사람 같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2/20200612033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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