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밭 새벽편지(행복한 家)

[일상스토리]엄마와 나를 연결한 우주 언어

권영구 2025. 5. 23. 09:33

아빠의 불면증이 심해질 때 삶이 무거워진 엄마는 우리에게 나눠줄 따뜻함을 잠시 접어 두곤 했다. 엄마는 지친 영혼을 달래려 날갯짓을 쉬는 어미 새처럼 사랑을 물어다 입에 넣어주는 따뜻함을 잠시 멈추었다. 엄마의 쉼은 나에겐 서운함이었지만 결국 엄마를 살리는 힘이 되었다는 걸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경상도를 떠나 경기도에서 혼자 직장을 다니다 보니 크고 작은 일을 혼자 결정해야 했다. 엄마를 지키려고 노력하며 보냈던 어린 시절을 지나 보내고 인생의 여름을 맞이하면서 내 열매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강한 햇빛을 감당하려고 애썼다.

 

아버지 곁에 엄마를 혼자 두고 나온 미안함과 나까지 걱정을 보탤 수 없다는 여린 배려, 엄마에게 힘듦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눗셈이 아니라 제곱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힘들 땐 목소리에서 힘듦이 새어나갈까 봐 전화하지 않았고 바쁠 땐 바빠서 전화하지 못했다. 그렇게 엄마와 나의 통화의 간격이 벌어졌다.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가끔씩 전화해 아버지로 인해 힘든 마음을 하소연하셨다. 내 마음이 풍요로울 땐 엄마의 푸념을 듣고 마음을 나눌 여유가 있었지만 내 마음이 바닥을 드러내거나 엄마의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는 쪼그라든 마음으로 나자신을 지키기도 벅찼다. 감정의 동요가 내 생활을 흔들었고 아이들과 행복을 쌓는 데 영향을 미쳤다. 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내 영혼이 더 강해지고 내 무게중심이 더 무거워야 했다.

 

어느 날 약국에서 약을 사고 있는데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친정엄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이 학교에서 있었던 문제를 친정엄마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의논하는 듯했다. 나는 한 번도 엄마에게 일상의 사소한 문제를 의논한 적이 없었다. 남편과 심하게 다퉈도 시어머니에게 억울하고 어이없는 말을 들어도 엄마에게 전화해 털어놓지 못했다.

 

엄마의 무거운 짐 위에 나의 짐까지 올릴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은 엄마와 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했다. 원래 가족은 사소한 걸 나누면서 가까워지고 함께 하는 것인데 내가 어떤 슬픔을 느끼는지 어떤 걱정이 있는지 엄마에게 털어놓지 못하니 전화 통화는 건조하고 형식적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내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고 난 뒤 생선을 반 토막 내듯 아팠던 마음의 반을 싹둑 잘라내고 단단하게 남은 뒷부분만 전했다.

 

부모가 힘들어하는 걸 보며 자란 아이는

힘든 일이 있어도 부모에게 털어놓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힘든 짐을 내려놓고 기대어 쉴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주려면

부모 자신이 단단하게 바로 서야 한다.

 

몇 년 전 아버지와 엄마의 갈등이 커질 무렵, 아버지는 다리를 다치셨고 엄마는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다.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을 듣고 어쩌면 엄마를 한 번도 안아주지 못하고 떠나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망치처럼 나를 내리쳤다.

 

언젠가 훌쩍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르는 엄마를 생각하며

처음이라 쑥스러울 뿐, 하다 보면 괜찮을 거라고 용기를 주는 아들을 생각하며

엄마를 볼 때마다 엄마를 안아주던 남편을 생각하며

엄마를 안아주기 위해 엄마에게로 갔다.

 

내가 엄마에게 보이는 감정의 농도가 솔직하고 진할수록 사이도 가까워지고 상처도 없어진다는 걸 그때 서야 깨달았다. 수술을 무사히 끝낸 엄마를 만나던 순간, 엄마를 꼭 안아드렸고 엄마도 내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중년이 되어 일상에서 부모님을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건

부모님의 몸과 마음이 크게 편찮으시지 않은 덕이고

부모님을 생각했을 때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건 살아계신 덕분이었다.

 

더 젊었을 땐 엄마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버리고 용서와 이해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더 따뜻하고 애틋하게 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프고 난 후에야 엄마에게 그런 마음을 바라는 것 자체가 나의 욕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 엄마를 떠나왔다. 그간 엄마가 겪은 마음의 상처를 나는 알지 못한다. 엄마의 마음이 무엇이든 그것을 존중해줘야 했다.

 

엄마, 사랑해

 

엄마와 통화를 하다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엄마를 깊이 이해하고 엄마를 존중한다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옹알이만 하던 아기가 처음으로“엄마”하고 부르는 순간처럼

그 순간이 너무나 소중해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힘들었던 엄마에게 이제야 “사랑해”를 말한 무심한 딸이라며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의 정신이 온전할 때,

엄마가 누워 있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엄마가 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때,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기로 했다.

“사랑해”라고 말한 후의 눈물이 미안함과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과 공존의 눈물임에 안도했다.

 

요즘 엄마가 나에게 이 말을 자주 한다.

 

“내가 니를 안 낳았으면 어쩔 뻔 했노.”

 

엄마가 나를 낳아줘서 지금의 소중한 가족도 만나고 세상의 행복도 알게 되었잖아요.

엄마는 이제 꽃씨가 되어도 돼요. 이 예쁜 봄에 아름다운 작약으로 다시 피어나요.

 

내 가정을 세우기 위해 엄마의 아픔을 외면한 시기를 엄마는 이해해 주었고

엄마의 쉼의 시간을 나도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제 엄마와 나는 남겨진 상처 없이 서로를 안아줄 수 있었다.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원래 삶의 길은 끝이 있는데

원하고 바라는 마음이 끝이 없다면

소망보다 삶이 먼저 끝날 것이다.

 

엄마의 암 발병은 우리 가족에게 망치가 되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소망하기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함을 나에게 알려 주었고 아버지를 엄마의 진정한 보호자로 만들었다.

 

엄마와 나의 언어는 요구하고 원하는 언어가 아니라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고 격려하는 언어로 채워졌다. 엄마와 나의 말투는 건조하고 투박한 무뚝뚝한 것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다정한 것으로 변했다.

 

나의 정신적 온기가 되어 준 현재 우리 가족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통화가 뜸한 사이에서 자주 통화하는 사이가 된 엄마와 나는 각자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다 서로를 생각하는 애틋함과 애정이 연결될 때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연인이 되었다.

 

오랫동안 접혀 있던 엄마와 나의 책은 새롭게 펼쳐진 페이지 위에 많은 대화를 써 내려갔다.

엄마와 나를 연결하고 치유하는 우주의 언어로.

 

 


by 너나들이 https://brunch.co.kr/@a4cb887aea174df/281
(위 글은 작가님께서 행복한가에 기부해주신 소중한 글입니다. 행복한가 이 외의 공간에 무단 복제 및 도용하는 행위를 금지하며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