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 자본주의
매튜 비숍·마이클 그린 지음|안진환 옮김|사월의책 | 504쪽|1만8000원
작년 5월 초 미국 뉴욕에 있는 뉴욕대 총장 관저에서 억만장자들의 은밀한 모임이 있었다. 록펠러 가문의 좌장(座長)인 데이비드 록펠러가 주최한 이 모임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오마하의 현인(賢人)'으로 불리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뉴욕시장 마이클 블룸버그,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CNN 창업자 테드 터너, 헤지펀드의 제왕 조지 소로스 등이 참석했다.참석자들의 면면은 다양했지만 모두 거액의 자선기부로 유명한 인사들이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도 부자들의 기부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게이츠와 버핏이 주도해 우선 10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미국 부자들을 대상으로 재산의 절반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해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 400대 부자들의 재산 총액은 1조2000억달러에 이른다. 이들이 모두 재산 기부 요청을 받아들이면 최소한 6000억달러의 기부금을 모을 수 있다. 경제규모 세계 17위인 터키의 작년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금액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자선 대국'이다. 국내총생산에서 자선기부금 비율은 미국이 1.67%로 영국 0.73%, 독일 0.22%, 프랑스 0.14%, 네덜란드 0.45% 등 다른 선진국들보다 월등히 높다. 온라인 잡지 '슬레이트'가 매년 발표하는 거액 자선기부자 순위 '슬레이트 60'에 오르기 위한 최소기부액이 1997년 1000만달러에서 요즘엔 3000만달러로 뛰어올랐다. 게이츠와 버핏은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거의 대부분 자선사업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록펠러와 카네기 이래 부호들의 거액 자선기부는 미국의 오랜 전통이다.
책은 여기서 '기부 서약' 운동 등 새로운 형태의 기부방식들을 소개한다. 또 단순히 기부금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비즈니스적 재능과 역량을 자선 분야에 적극 활용하려는 새로운 유형의 자선가들도 나타나고 있다. 기부금이 헛되이 낭비되지 않도록 투자은행 스타일의 연구 분석을 통해 효율과 성과를 측정하거나, 빈곤층에게 소액의 사업자금을 대출해주고 여기서 나온 이자로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미소금융'처럼 영리적 동기를 이용해 자선사업의 지속성을 높이는 등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레버리지' '전략적 협력' '포트폴리오 접근법' 같은 낯선 용어들이 자선분야에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적 선행의 차원을 넘어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기부를 통해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흐름이 바로 '박애 자본주의'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그 한계를 드러낸 불공평하고 불안정한 '승자 독식'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다. 20세기 초 자선사업의 새 지평을 열었던 카네기는 "사회의 경제번영으로 가장 커다란 수혜를 입은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데 자신의 돈과 재능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이 책은 카네기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선기부와 자선사업의 새로운 황금기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책은 '박애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론도 짚어본다. 한편에선 빈곤 퇴치 같은 사회적으로 중대한 문제들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최적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자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거액 기부가 감세 혜택을 받거나, 재단을 설립해 자녀들에게 안정적으로 먹고살 길을 마련해주려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다른 한편에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자선사업에 뛰어드는 것보다 비즈니스에 주력하는 게 사회에 더 공헌하는 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저자들은 결론적으로 박애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금보다 훨씬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자선가와 기업, 정부, NGO, 일반시민이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며 이를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아직도 천민(賤民) 자본주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