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밭 새벽편지(행복한 家)

[일상스토리]별 거 아냐

권영구 2025. 2. 22. 11:06

1999년 즈음 우리 집은 기존에 살고 있던 도심 외곽의 작은 아파트를 떠나 외삼촌이 살고 계시던 한적한 동네의 낡은 주택으로 이사했다. 1997년 IMF가 터진 직후, 이사를 하자마자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는데 당시 내 나이 9살, 동생은 6살이었다. 9살의 나는 이제 다 큰 아이가 되어 엄마가 없을 때의 ‘엄마’로서 동생을 잘 챙겨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엄마는 문 잠그는 법부터 시작해 집의 비상키 위치와 우리 집 주소, 엄마 회사 전화번호, 아빠 휴대폰 번호, 내가 다닐 초등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 동생의 유치원 위치와 동생의 하원 시간 등등 기본적으로 ‘엄마’라면 알고 있어야 할 법한 것들을 외우게 했다. 그날의 나는 IMF가 무엇인지 확인한 서글픈 목격자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용돈을 받아 썼는데, 엄마는 그날그날 하루의 용돈을 부엌 서랍의 제일 위 칸 작은 바구니 안에 넣어 두셨다. 용돈은 적게는 몇백 원에서부터 가끔 준비물이 있을 때 준비물 비용을 포함해 이천 원 정도였다. 그 용돈은 엄마가 퇴근하여 돌아오시기 전까지 나와 내 동생의 하루 밥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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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분식집에 파는 떡볶이는 작은 종이컵 한 컵은 300원, 조금 긴 슬러시용 종이컵은 500원이고 삶은 계란을 추가 하느냐 마냐는 선택사항이었다. 작은 피카추 돈가스 한 장은 500원, 조금 더 크고 정확한 피카추 모양의 피카추 돈가스는 700원이었는데, 나는 떡볶이를 좋아했고 동생은 피카추 돈가스를 좋아했다. 평균 하루 용돈 천 원 남짓으로 500원짜리 피카추 돈가스를 동생에게 사 주고 나면 나는 300원짜리 떡볶이를 먹어야 했다. 그래야 200원을 남겨 내일도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한참 크는 때였던지라 300원짜리 떡볶이로는 나의 무지막지한 성장기의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런데 동생은 항상 500원짜리 돈가스? 그것도 얼마 없는 내 떡볶이를 종종 나눠 먹기도 하는데? 그렇다. 나는 내 용돈으로 뭔가 계속 불공평한 짓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저 녀석에게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배부른 것을 먹여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요리를 처음 해 본 것이 이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출근 전 종종 밑반찬을 만들어 놓고 가셨는데, 안타깝게도 밑반찬은 밥반찬으로는 훌륭했으나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이 좋아할 만한 ‘요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간단한 요리부터 배우기로 했다. 가벼운 계란프라이와 새송이버섯 볶음부터 시작하여 음식의 간을 하는 방법이라든지 어떤 요리엔 어떤 조미료가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등등을 배웠다. 일단 먹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그렇게 알음알음 배워서 요리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엄마가 퇴근하면서 마트에서 빵가루를 입힌 돈가스 몇 장을 사 올 때면 그날은 나에게 호재였다. 동생은 집에 있는 돈가스를 튀겨 주고 나는 맛있는 걸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열심히 배운 것을 토대로 실험 대상인 동생에게 음식을 해 주니 주는 것마다 덥석덥석 잘 먹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몇몇의 요리는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하거나 엄마가 하는 것보다 내가 해 준 음식을 더 맛있게 먹기도 했다. ‘아! 됐다.’ 이렇게 내가 가장 처음으로 느꼈던 성취감은 300원에서 500원짜리 떡볶이를 먹기 위한 일종의 알량한 권모술수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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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어린 시절 엄마 대신 해 준 내 어설픈 요리를 동생이 맛있게 먹어줬기 때문이다. 나에게 ‘요리’는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라기보다는 내 목적한 바를 이루게 해 주는 수단에 가깝다. 나는 내 요리를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기대한다.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밖에 없던 어린 시절의 동생에게 그랬듯이, 이제는 남편에게 그 모습을 기대한다. 남편도 누나가 있는 동생이라 그런지, 내가 한 저녁을 맛있게 허겁지겁 먹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종종 그날의 동생을 목격하곤 한다. 그렇게 내 일상 속 작은 성취가 매일 일어나고 있는 요즘이다.

 

 


by.현주영 https://brunch.co.kr/@pawn7294/7
(위 글은 작가님께서 행복한가에 기부해주신 소중한 글입니다. 행복한가 이 외의 공간에 무단 복제 및 도용하는 행위를 금지하며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됨을 알려드립니다.)